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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꽃 Jan 01. 2025

다낭에서의 마지막 아침

공황

약속된 패키지 여행 체크아웃 시간은 11시 20분. 나는 사우나를 다녀와서 10시 반부터 짐을 싸기 시작한다. 방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서진이와 자신의 짐은 남편이 책임지고 싸고, 나와 우진이 짐은 내가 책임지고 싼다. 남편은 자신은 담당한 짐을 거의 다 쌌는데 나는 싸야 할 짐도 더 많으면서 왜 이리 늦게 왔고 짐 싸는 속도도 왜 이렇게 더디냐며 추궁하고 질책한다.


그는 아이들도 몰아붙인다. 서진이는 아빠의 핀잔과 인격 모독 수준의 잔소리를 듣고 얼굴과 귀까지 빨개지며 "아빠 미안해"를 반복한다. 밤새 열로 아팠던 서진이에게 그렇게까지 스트릭트 한 남편이 정상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이의 주눅 든 표정과 말투는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우진이는 아빠의 화가 무서워 장롱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남편은 그런 우진이를 불러내서 쓰레기 정리라도 하라며 화를 낸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그의 불같은 "왜 이렇게 못 치우냐?" "빨리 해!"라는 말이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받았던 정서적 학대와 오버랩되면서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내가 체크아웃 전까지 나와 우진이 짐은 어떻게든 알아서 잘 싸서 내려갈 테니 본인 짐 정리 다 했으면 제발 아이들과 먼저 내려가서 로비에서 공짜 커피 쿠폰 마시면서 잠시 쉬고 오라고 했다. 그는 내가 짐 싸는 꼴이 못 미더운 듯 계속 나가지 않고 투덜거리며 남은 짐과 호텔 청소 상태를 점검하면서 계속 내 짐을 참견한다.


옆에서 계속 잔소리하면 방해만 되니 제발 먼저 나가서 즐기라는 나의 부탁에 그는 못 이기는 척 무료 커피 쿠폰을 받아 들고 자신의 짐들을 챙겨 들고 아이들과 내려갔다. 아뿔싸 그런데 5분 만에 다시 올라온다. 커피숍이 아직 오픈 전이라고 한다. 커피숍은 없어도 조각 공원이 앞에 있고 3박 일정 중 유일하게 지금 비가 안 오고 날이 좋으니 일단 좀 나가서 아이들과 사진도 찍고 좀 쉬고 있어 달라고 재차 부탁하는 나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는 쉬지 않고 나를 쫓아다니며 재촉한다. "왜 이렇게 맨날 늦게 준비하냐. 미리미리 왜 안 싸냐?"는 그의 잔소리가 계속해서 내 귀를 찌른다. 남편은 아이들에게도 정리하라는 잔소리와 질책을 하며 위협을 가한다. 아이들은 모두 잔뜩 겁에 질려 있다.


아직 시간이 10분 정도 남았고 짐은 거의 다 쌌다. 트렁크만 닫으면 되는 수준. 나는 최종 점검을 하기 위해 분주하다. 하지만 남편의 질타와 잔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짐을 거의 다 쌌고, 아직 시간이 10분이나 더 있잖아!"라는 내 말에 그는 "너의 그런 안일한 태도와 늑장이 문제라고!!" 하면서 더 심하게 나를 질타한다.

"지금 로비에 사람이 지금 얼마나 많이 밀려 있는지 알아? 체크아웃하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리기 때문에 시간을 딱 맞추는 것이 잘하는 일이 아니고 더 빨리 나가야 하는 거라고!! 패키지 여행객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되지! 저번에도 네가 젤 늦었잖아!!" 그는 더 거세게 마구 몰아붙이며 참고 있는 나를 자극한다.


나는 촉박한 시간에 예기치 못한 강한 압박감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 전형적인 J유형이다. 그의 계속된 자극에 결국, 참고 있던 내 안의 울화와 불안이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혼자 베란다로 나가 숨을 고르려 하지만, 남편은 "지금 뭐 하는 짓이냐?"며 트렁크를 발로 차며 "빨리 안 닫아?!!"라고 소리치고 있다. 나는 그 폭력적인 소리에 비명을 지르고 손을 떨며 더 큰 공황 발작을 일으킨다. 내 마음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죽으란 거냐?"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리조트 전체가 내 비명으로 가득 찼다. 생각지 못한 나의 과격한 반격에 남편은 당황하며 급히 베란다로 나와 나를 끌고 거실로 들어와 베란다 문을 닫고 소파에 앉혔다. 난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리조트 전단지를 두 주먹으로 움켜쥐며 괴로운 비명을 계속 지르며 울부짖었다. 아직 나의 병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될 줄은 몰랐다. 남편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다급하게 나를 끌어안고 일단 자기가 미안하다며 달랜다.


나를 잃을 정도의 발작. 그 와중에 문득 보인 아이들의 놀란 눈동자와 목소리.. "엄마, 괜찮아?" 나는 아직 진정이 되지 않았지만 애써 정신을 차려 짐을 챙겨 가족들과 로비로 내려왔다. 하지만 체크아웃 후 로비에 앉아서 패키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남편의 질책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미안해.. 그러니까 내 말대로 미리미리 잘 좀 하지 그랬어!!" 라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나를 비난하는 그의 말에 난 또다시 눈물이 쏟아지고 손발이 저려온다. "여보의 이런 태도가 나를 더 이렇게 만드는 거야.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알기나 해? 난 매일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괴로워. 이제 직장이고 가족이고 다 포기하고 싶고 내 인생은 회생 불가능 같고 모두 다 망한 거 같아" 나도 속 마음을 다 퍼부었다. 로비의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부부싸움 구경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내 맘대로 퍼부었다. "애들이 엄마가 필요하고 나도 아플 때는 여보 밖에 없는데 무슨 소리야." 그는 평소에 없던 자상한 모습으로 애써 따뜻하게 나를 달래고 또 달랬다. 내 마음은 한결 나아졌지만 눈물이 계속 흐르고 몸은 떨려오며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런데 그는 급하게 신경 안정제 약을 찾아 먹으려는 나를 막으며 "아침약 먹었다면서 왜 또 먹냐? 병원에서 약 너무 자주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라며 다시 나를 약물 중독자 취급하며 비난한다. 내가 매일 밤 잠을 못 자고 병원을 다니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내 고통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지도 문제를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로비의 사람들이 몰려와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남편은 여전히 "그러니까 잘했어야지"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담배를 피우려는 듯 로비를 벗어난다.


이 모든 혼란은 내가 마지막 아침을 조금 다르게 보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패키지여행 시작 후 3일 내내 남편의 몸살감기 수발로 혼자 독박육아를 하며 제대로 쉬지 못했었다. 마지막 날은 드디어 남편의 감기도 좀 호전이 되었고 빡빡한 패키지여행 중 처음으로 혼자 아침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는 짬이 생겨서.. 새벽부터 호텔 근처를 산책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아이들과 마지막 조식을 함께하고, 사우나에서 잠시 나를 추스르려 했던 것뿐이었다. 그렇게 체크아웃 50분 전 돌아온 호텔방,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남편은 "네가 싸야 할 짐들이 산더미 같고 체크아웃 대기 줄이 길 수 있기 때문에 최소 10분 전에는 내려가야 안 늦을 것 같은데, 뭐 하다가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난리를 친 것이다.


이번 여행 내내 나도 공황장애 증상과 감기 증상으로 힘들었지만 나보다 남편의 아픔을 돌보고, 아이들을 혼자 챙기며 패키지 일정을 맞춰 움직이며 참아왔다. 첫날부터 그의 진상스러운 모습을 보며 언젠가 한 번은 터질 것을 예감했다는 가이드와 주변인들의 말처럼, 이는 예고된 폭발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이드도, 다른 여행객들도 이해했던 상황을, 정작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가슴 아팠던 건 서진이를 향한 그의 태도였다. 짐을 제대로 못 싼다며 구박하는 동안, 아이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얼음이 된 채 "아빠 미안해"를 반복했다. 그 순간, 나는 이 여행이 우리 가족에게 남길 상처가 너무나 깊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우진이는 아빠의 화가 무서워 장롱 속으로 숨고, 서진이는 주눅 든 표정으로 얼굴과 귀까지 빨개져 안절부절못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불안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끝난 후, 나는 다시 한번 내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다낭에서의 마지막 아침은 행복한 기억이 아닌, 아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순간으로 남았다. 가족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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