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보내야 할 때를 아는 지혜
※ 이 글에는 영화 <만약에 우리>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관람 후 읽으시길 권해 드립니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의 영역에 둔다. 그래서 잃어버린 사랑은 실패로, 곁에 두지 못한 인연은 미완성이라 여긴다. 영화 <만약에 우리>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짓누르던 것도 그 '실패감'이었으리라. 찬란했던 사랑, 매듭짓지 못한 이별, 눅눅한 회한, 그리고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두 사람.
이런 전개의 로맨스 영화라면 응당 슬픈 순간이었어야 할 엔딩이다. 그러나 나는 정원이 은호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그 장면에서 비로소 정원의 세상이 완성되었다고 느꼈다. 사랑했던 연인과 영영 남이 되었고, 10년간 놓지 못한 인연의 끈이 끊어지면서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진정한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흑백 영화처럼 칙칙하던 그들의 세상에 다시금 선명한 색채가 입혀진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정원은 가족 없이 외롭게 자랐다. 하늘 아래 발 뻗을 곳 하나 없던 정원에게, 은호와 아버지의 낡은 식당은 유일한 '집'이 되었다. 은호와의 사랑에 있어 정원은 두려웠을 것이다. 연인 관계란 얇은 유리 같아서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법이다. 만약 은호와 헤어지게 된다면, 그녀는 사랑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가족을 대신하던 공간마저 잃게 되는 셈이었다.
"서울에 내 집 하나 갖는 것"이 꿈이라고 친구들에게 던진 그 말 속에는, 타인의 공간에 기생하듯 머무는 삶에 대한 깊은 결핍이 숨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건축사'라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별의 발단이 된 그날의 낡은 선풍기, 은호가 무심코 독점했던 그 바람 앞에서 정원은 뼈아픈 자각을 했을 것이다. 자신을 향해 선풍기 고개조차 마음대로 돌릴 수 없는 이곳은 은호의 집일 뿐, 결코 나의 온전한 안식처가 될 수 없음을. 결국 그녀는 컵라면 하나만 덩그러니 둔 채 은호의 곁을 떠난다.
모든 만남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 이를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 한다. 우리는 흔히 인연을 내 노력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내가 더 잘했다면, 그때 우리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달라졌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계절이 지나면 피었던 꽃이 지듯, 사람의 인연 또한 그 시간이 다 하면 자연스레 놓아주어야 한다.
은호와 정원의 인연은 청춘이라는 그 계절, 거기까지였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인연의 계절이 다했을 뿐.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자연스러운 섭리를 매듭짓지 못하고 붙잡으려 했기에, 그들의 현재는 빛을 잃고 흑백 세상에 갇혀 있었다.
그 지독한 무채색의 정체를 깨뜨린 건 은호의 아버지가 남긴 편지 한 통이었다.
인연이란 게 뜻대로 안 돼서 서로 실망시키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도 밥은 챙겨 먹고 다녀라. 힘들면 언제든 와서 밥 한 끼 하고 가고.
이 투박한 문장은 '관계가 끝나면 안식처도 사라진다'는 정원의 오랜 불안을 단번에 깨뜨린다. 연인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네가 우리 아들과 헤어져도 너는 여전히 따뜻한 밥을 먹을 자격이 있는 '내 식구'라고. 아버지는 편지를 통해 정원에게 말하고 있었다. 사랑이 끝나도 네 삶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너는 누군가의 연인이기 이전에, 밥을 먹고 살아가야 할 온전한 존재라고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건축사가 된 정원은 햇살이 잘 드는 자신만의 집에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은호 아버지가 차려준 마음의 밥상 덕분에 정원은 깨달았을 것이다. 타인의 곁에 곁방살이하듯 머무는 안정이 아니라, 스스로 나의 집을 지을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영화는 묻는다. 언제까지 '만약에'라는 질문으로 그 지나간 시간에 머물러 있을 텐가. 떠난 것은 떠난 대로 두고, 우리는 밥을 먹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 과거를 떠나보낸 빈자리는 상실이 아니다. 그곳은 비로소 '나'라는 주인이 들어설 공간이다.
사랑이 끝난 뒤 진짜 이별이란, 그 사람을 완벽히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없이도 오롯이 나로서 따뜻한 밥을 먹으며 오늘을 살아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