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의 단상 공책 2
_슈게이징
Memory Card라는 밴드의 앨범을 들으면서 나는 슈게이징에 사족을 못 쓴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슈게이징은 록의 한 장르로 ‘자기 신발만 보고 연주 한다‘라는 말에서 그 이름이 착안되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자기 신발만 보고 연주하는 록. 슈게이징은 일반적으로 ‘록’ 하면 떠오르는 파워풀하고 생기 넘치는 분위기는 전혀 없고 흐릿하고 뭉개지고 몽환적인 장르다. 선명한 것보다 흐릿한 걸 좋아하는 내 취향은 이렇듯 어디 가지 않는다. 내가 갈 길도 비슷하지 않을까. 결국에는 흐릿해도, 혹은 흐릿해서 흥미로운 길을 가게 되지 않을까.
_문장 하나
아무도 감동받지 않을 것 같은 문장, 혹은 글쓴이가 애초에 독자를 감동시키려고 쓴 게 아닌 듯한 문장에서 심한 감동을 느낄 때가 있다. 『명작 이후의 명작』이라는 문학평론집에서 황종연 문학평론가가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성별 되어(…)”라고 쓴 문장이 내게 그러하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성별 된다’라고 표현한 것은 남과 여라는 성별은 오롯이 사회의 시선 아래 분화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비추이는 것이 아닐까. 남자, 여자라는 구분은 순전히 세상의 구분이라는 생각. 생물학적 성은 남자이지만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생물학적 성은 남자이지만 자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세상은 모든 이들을 생물학적 성으로 성별 시켜 버리니까. 나는 이 짧은 문장에서 통찰력과 사려 깊음을 보았다. 내 과대 해석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미 감동받아 버렸다.
_먼지를 보며 쓴 이야기 (제목 : 먼지의 목표)
한낮에도 가만한 어둠에 잠긴 창고에 낡은 액자처럼 걸려 있는 작은 창을 연다. 때가 타 있는 손잡이는 오래 방치된 탓에 차갑고 완고하다. 힘껏 쥐고 시계 방향으로 구십도, 우지끈 돌린다. 손잡이가 열림 위치에 놓이고 나는 손잡이를 그대로 쥐고 바깥을 향해 열어젖힌다. 끼긱 하는 마찰음과 함께 창이 열리면 그제야 길쭉하게 조각난 모양으로 햇살이 들이 찬다. 경이로울 것 없는 광경이다. 하여 반쯤 돌아섰을 때 부유하는 먼지들을 마주한다. 햇살과 함께 들어온 새로운 공기와 내가 반쯤 돌아서느라 생긴 공기의 움직임에 요란을 떨며 부유하는 먼지들이 햇살에 반짝인다. 두리둥실 춤을 추는 게 아니다. 이리저리 나부끼는 것이다. 허공의 이쪽저쪽으로 몸을 놀리는 희멀건 먼지들이 볼썽사납다. 정신이 없다.
그러나, 그러다, 먼지의 종착지에 대해 생각한다. 먼지의 종착지는 결국 바닥이다. 먼지는 자신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에 종착한다. 그러니까 먼지들이 정신없이 몸을 놀리는 이유는 저마다의 바닥에 닿기 위함이다. 단단한 어딘가에 정주하기 위함이다. 창고 바닥 위에, 낡은 서랍장 위에, 시계추가 멈춘 지 오래인 괘종시계 위에, 잊혀진 모든 물건들 위에 소복이 쌓여 있는 먼지들은 그러므로 아늑한 정주의 상태에 이른 것이고 창고는 먼지들의 낙원이다.
정주(定住)를 향하여, 창백한 몸으로 한없이 나풀거린다. 어쩌면 일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