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소릿고 #13

제2장 광대의 길(2)

by 취중진담

발행일 2025.12.01. pm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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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노트>

한 편, 고창 동리정사에서는 여름이 익어가고 있다. 동서남북 사대문 지붕을 덮은 포도넝쿨에 주렁주렁 포도송이가 달리고, 지방의 토호 황진사가 신재효를 찾아온다.

중인이라는 태생의 한계로 인해 아무리 부를 축적하고 대외적인 선행을 배풀어도 향반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재효.

동리라는 호를 가진 재효가 그래서 사방문에 포도넝쿨로 문지붕을 만든 것이다. 동리정사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도록.

황진사는 어쩔 수 없이 들어와야 하지만 결코 허리를 굽히지 않고 무릎을 접어 키를 낮춰 들어오는 방법을 선택한다.


제2장 광대의 길(2)


운명(2)


동리 신재효.

그의 집안은 윗대로부터 한미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 신광흡은 중인이라는 신분을 넘어서려는 열망이 그 누구보다 대단했던 사람이었다. 경서를 두루 읽고서 잡과를 보았는데 천문지리, 역수, 측후, 점산에 관한 일을 하는 관상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사는 것은 지루하기만 했다.

답답했던 광흡은 관상감을 과감히 그만두고 경저리 일을 택했다.

경저리란 관과 관, 관과 사, 사와 사의 소식을 부지런히, 신속히, 정확히 전해주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분명 길이 열릴 거란 판단에서였다.

그런 광흡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고창의 관약방을 개설할 권리를 따낸 것이었다.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한계는 있었다. 양반은 양반이고 중인은 중인이었다.

광흡은 어린 재효에게 귀가 막히도록 일렀다.

운명에 고개 숙이지 마라. 운명은 고개 숙이는 자를 농락한다. 상대를 숙이게 할 뿐, 결코 니가 고개 숙이지 마라. 고개를 숙이는 대상은 굶주리고 헐벗는 사람이니라. 공부하고 베풀어 민심을 얻어라. 그리하여 가능하지 않는 일은 없다.

“이건…뭔가?”

사랑으로 들자마자 서안 아래 차곡차곡 쌓인 종이를 본 황진사가 발끝으로 뒤적이며 물었다.

“악봅니다. 발로 뒤적거릴 것들이 아닙니다.”

굳이 불편한 속을 숨기지 않는 재효의 음성이 황진사가 이죽거렸다.

“광대, 광대라….”

재효는 황진사의 얇은 입술에 촉수를 박았다.

“자네가 말이야. 이런 것들로 상것들이 놀 덕석을 짜느라 무척이나 바쁘다는 소문을 듣긴 했으나….”

이번에는 손가락 끝으로 악보 한 장을 집어올려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재효는 정면을 맞받았다.

“소문이 아니라 영감.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자 버럭, 고함소리가 날아왔다.

“작청을 짓고! 당산 미륵석주를 세운 자네 아버지가 알면 널을 박차고 일어날 일이 아닌가 말이야!”

아버님 이야기만 나오면 천한 약방쟁이라 씹어대던 작자가 웬일인고? 조금만 더 들으면 아버님의 유애비라도 세워주겠다고 할 판 아닌가?

재효는 싱긋 대답했다.

“그 일을 제 사명이라 여기고 있습니다만….”

“이것 보시게 동리!”

예상과 달리 황진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거 이왕이면 좀 점잖은 일을 할 수 없겠는가 해서 하는 말일세.”

“점잖은 일이라하셨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미천한 저로서야 알 도리가 없습니다.”

황진사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리고는 재효의 귀앞에서 속삭거렸다.

“말이야, 차라리 그 돈으로 서원을 세우든가 향교를 세우는 게 어떤가? 자네 재력이라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곧 서원철폐령이 내려질 거란 소문이 자자한 시국에 웬 궁둥이로 봉창두드리는 소린가 싶었지만 필시 속내가 있는 언사이리라.

“말씀을 하십시오, 영감.”

“실은 말이야…. 그래야 자네와 내가 격을 좀 맞추지 않겠나 싶어서지.”

“참 영감도. 제가 살을 다 베어내고 뼈를 다 갈아없앤다 한들 어찌 영감과 격을 맞춘단 말입니까? 모르십니까? 저는 약방쟁이 신광흡의 아들입니다.”

“어허! 이거 왜 이러나. 다 지난 인인 것을. 그나저나 이보게 동리! 사대문 닫으면 다 한집안인데 니집 내집 할 것 있겠나?”

대체 이 작자가 무슨 꿍꿍이로 사람을 이리 기울 저리 기울 저울질을 하나 싶을 때 술상이 들어왔다.

“어흠.”

그제서야 천정이 무너지랴 서 있던 황진사가 두루마기 자락을 젖히고 앉았다. 제효는 결코 아랫목을 내어주지 않았다.

“실은 말일세. 내가 동리 자네한테 제안을 하나 할까 해서 왔다네.”

황진사가 상체를 재효쪽으로 바투당겼다.

“실은… 자네도 알다시피 내게 여식이 하나 있지 않겠나?”

“여식이라니요? 다들 출가를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앵매 말일세.”

재효는 앵매를 떠올렸다. 고창고을에서 유명짜한 소문을 뿌리고 시집은 간 아이다. 마을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내치고 앵매 맛 안 본 이 없고, 관아의 옥중 죄인들조차 앵매 맛 못 보면 등신이라는 소문까지 돌아 귀열고선 차마 들을 수 없는 소문을 끌고 다니던 아이였다. 그러다 한 덩치 뚝 떼어서 맡기듯 재취로 보냈는데 밖에서 들려온 소문이 또 귀를 어지럽혔다. 집사일 보던 도수라는 사내와 바람이 났다고 하는 소문이었는데 기어이 소박을 맞고 돌아왔단 말인지.

홀로 생각에 잠겼는데 황진사의 음성이 독 묻힌 촉처럼 날아와 꽂혔다.

“그 아일… 자네가 맡아주어야겠어.”

맡아주다니?

재효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동리정사에 머물게 해 달란 말인가? 무엇 때문에? 혹 머물면서 무슨 일이든 하게 해 달란 소리일까.

하지만 앵매라는 아이의 심성은 절대 그럴 위인이 못된다.

그렇다면?

“영감!”

재효의 입에서 나온 소리엔 가시같은 날이 섰지만 황진사는 비식비식 웃었다.

“솔깃한가 보구만?”

“무슨 사정인진 모르지만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돌아가시지요.”

“하긴 자네로서는 버겁기도 하겠지. 물경 서른이나 차이가 나는 나이가 아닌가. 하지만 자네 물건이 벌써 영 못쓸 물건은 아닌 줄 아는데?”

싸늘한 재효의 표정을 보고서도 황진사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만 돌아가시라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속보이는 거짓말이 뭔 줄 아나? 늙은 사내가 젊은 기집 싫다는 말일세.”

재효는 두루마기를 휙 젖히며 벌떡 일어섰다.

“살펴가십시오.”

“어허, 게 앉게. 앵매가 족두리를 처음 쓰는 것도 아니질 않는가. 내 그냥 보냄세. 자네 역시 사모관대 바라지는 않을 일 아닌가. 아참, 그래도 사주단자는 보내야겠지?”

이 자가 사람을 어찌 이리도 능멸을 한단 말인가?

끓어오르는 격정을 누르느라 감은 재효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두두둑 떨어져내렸다.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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