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광대의 길(1)
발행일 2025.11.24. pm8:00
<전편노트>
결국 작두가 설치되고 작두 위에 오른 절체절명의 순간, 채선의 입에서 소리가 터져 나온다.
작두 위에 얹힌 발바닥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낭자하다.
월녀는 오열하고, 만신 장씨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깨닫고 포기하는 사이, 채선은 굿당을 탈출한다.
제2장 광대의 길(1)
운명
여름이 되었다.
천지가 검초록으로 뒤덮였다. 사천 평 너른 집안 한 가운데 오똑하니 솟은 석가산 댓잎도 검초록이고, 연지정 둘랫돌 사이의 난잎도 검초록이다. 약재용으로 심어놓은 두충나무 잎도 검초록이다. 동서남북 사방문마다 얽어놓은 시렁 위로도 포도넝쿨이 넌출넌출 검초록으로 덮였다.
동리정사 사대문의 포도는 마을 아이들의 것이었다. 누가 와서 따먹어도 괜찮았으나 철칙은 있었다.
음력 칠월 대서가 지나 완전히 익어야 따먹을 수 있다는 것인데 설익은 포도를 따다 들키는 아이는 그 여름 내내 익은 포도 한 알 얻어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이란 참고 기다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니 때를 거슬러 서두르는 자는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다는 것.
바로 동리의 철칙이었기 때문이다.
“호장 어른!”
발을 드리운 채 앉아 네 번째 아내가 남긴 옥비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는데 행랑채 아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비녀를 비단주머니에 넣으려다 말고 동리는 대답 대신 비녀를 다시 한 번 쓰다듬는다. 재물이라면 조선 천지 내로라 할 사람 없는 사람의 안사람으로 십년을 살면서도 아내는 이 옥비녀 하나만을 고토록 고집했다.
이 몸 죽으며 이 비녀 보기를 저인 듯 하셔요.
그랬기에 아내는 자신의 명이 끝나가는 것을 안 뒤로 비녀를 재효의 손에 쥐어 주었다. 상을 치른 후에도 그래서 늘 곁에 두고 꺼내보곤 하는데 말하자면 세 번째 아내의 옥비녀는 재효에게 있어 아내와 동일한 존재인 것이다.
“호장 어른! 안에 기신가요?”
“무슨 일인가?”
“황진사 어른께서 와 계십니다. 어찌할까요?”
재효는 그제서야 비녀를 주머니에 넣고 끈을 조였다.
“황진사라 했는가?”
“예, 호장어른께 의논할 일이 있답니다요.”
“무슨 일루?”
“저같은 것에게 말씀을 하십니까?”
황진사는 이 고을에서 대대로 세을 키워온 향리 중에 향리다. 한 때는 그 영향력이 인근 백 리에서 당할 자가 없었는데 사람 하나 잘못 들여 패가에 망신까지 당한 사람이다. 그리도 충복이던 사람이 어느 날, 땅문서에 세곡장부까지 몽땅 오다싸서 쥐도새도 모르게 야반도주해 버린 것인데, 그게 소박을 맞아 돌아온 외동딸과 무관치 않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황진사는 재효의 아버지 광흡을 일러 경저리짓 해 먹던 놈이 운이 좋아 관약방을 차려 갑부가 되었다고, 그런들 타고난 피가 바뀌냐고 입만 열면 질겅거렸는데, 그 사건부터는 조금 맥이 빠졌다.
그나저나 숨겨두었던 은결로 옛 부귀를 꾀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을까?
재효는 비녀주머니를 서랍속에 넣고는 다시 물었다.
“사람을 보내온 것이 아니고 직접 왔다는 겐가?”
“예. 동문밖에 직접 와 계십니다요. 어찌할까요?”
잠시 생각하던 재료는 비녀주머니를 서랍속에 넣고 서안을 물렸다. 일단은 맞아야 했다.
“알았네. 사랑으로 뫼시게.”
대청마루로 나가니 행랑아범이 돌아가질 않고 서 있었다.
“왜 그러고 섰는가?”
“그, 그제 저….”
행랑아범은 동문쪽을 바라보며 어찌할 줄 몰라 연신 ‘저, 저’를 연발했다. 재효는 피식 웃었다.
“알았네. 내 가 봄세.”
창마당을 지날 때였다. 남쪽 소리청으로부터 금파의 창소리가 들렸다. 예의 낭랑한 목청이 의식을 잡는다. 들을 감고 서서 잠시 소리를 들었다. 참으로 기이한 음색이다. 두툼하고 묵직한 언행과 달리 어디에서 저런 청아하고 맑으며 또렷한 음색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아내의 죽음이 마치 제 탓이라도 되는 양 괴로워하더니 이제야 평정심을 찾은 모양이니 다행한 일이다.
목청이 조금만 트였다하면 기적(技籍)에 이름을 올리는 세상에 여자의 몸으로 소리판에 뛰어들어 명창이 되겠다하니 일견 대견하기 이를 데 없다.
해서 내년 대사습에 내보려했는데 어지러운 나라사정으로 취소가 되었다니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다.
세상이 어찌되려는지….
황진사는 예상대로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 동문 포도넝쿨 너머에 서 있었다. 동리정사의 대문은 사대문의 이마가 모두 포도넝쿨로 얽혀 있는데 포도넝쿨을 지나오려면 허리를 숙여야 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송이가 영글어 주렁주렁 달린 포도넝쿨에 얼굴의 반이 가려졌지만 양태가 한결 좁아진 갓을 쓴 것이 보였다.
역시 권력이라는 힘을 이길 수 있는 재간은 없었던 모양이다.
“진사어른께서 어인 일로 저희 집엘 다….”
‘누추하다’는 따위의 입에 발린 소리는 덧붙이지 않았다. 결코 누추하지도 않거니와 지나친 겸손이 상대에게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기에 양반들 앞에서는 웬만해선 자신을 낮추지 않는 재효였다.
“동리 자네한테 내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왔네만.”
뒷짐을 진 채였지만 전에 비해 확실히 부드러워진 말투였다. 동리라는 별칭을 불러주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시다면 드시지 않구요.”
얼굴에 웃음기를 드리운 채 허리를 굽히자 황진사가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그, 그런데 어떻게….”
“왜요?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 넝쿨을 어떻게 좀….”
걷어달라는 뜻을 터이다. 너같은 중인의 집에 들면서 내 고개를 숙일 수 없다는 뜻.
재효는 공손한 말투로 거절을 의사를 전했다.
“아시다시피 이 포도는 제 것이 아닙니다. 마을아이들에게 여쭈어 보십시오. 곧 익어서 따먹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 그럼 나더러 어찌하란 말인가?”
“어쩌시긴요. 절 찾아오셨으니 드셔야지요.”
“뭐라? 날더러 이 밑으로 기어들어오란 말인가?”
“글쎄올시다. 어찌하시든지 그것 또한 영감 뜻이겠지만 그대로 서서 말씀을 하셔도 잘 받들어 뫼시기는 하겠습니다.”
“허허 참 나.”
난감한 듯 헛기침을 하던 황진사가 어찌할 수 없었던지 정강이를 접었다. 정강이만 접었다. 고개와 허리는 그대로 꼿꼿한 채 진짜 정강이만 접었다. 꼭 물동이를 얹은 오리꼴이었다. 재효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이 참에 시렁을 좀 더 낮게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노고가 크셨습니다, 영감.”
재효는 황진사가 포도시렁을 지나오는 것을 기다려 허리를 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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