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무녀의 길(9)
발행일 2025.11.17. pm8:00
<전편노트>
굿당의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는데 자기의 뜻과는 달리 몸이 반응함에 괴로워하는 채선.
이를 악물고 자기제어를 위해 소리를 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제1장 무녀의 길
내림굿(4)
밤은 점점 깊어져갔다.
대신거리를 끝내고, 호구거리를 끝내고, 산마누라거리도 끝이 났다. 그럴 때마다 채선의 몸에는 각양각색의 복색이 입혀졌고, 손에는 월도며 삼지창 요령 부채 등이 번갈아 들려졌다.
“무슨 말이라도 혀봐라, 아가.”
터질 듯 터질 듯하면서도 공수가 터지지 않자 애가 단 월녀가 부르짖었다. 꽹과리를 치던 장만신이 그 입 다물란 듯 시퍼런 눈으로 쏘아보았다.
“어허, 웃자하 상산대감 아니시리. 본향대감 아니시리. 에에 별상대감 아니시리.”
재물과 명예와 복을 가져다준다는 대감거리가 이윽고 시작되었다.
대개 대감거리에서 굿판의 승패가 결판난다. 작두도 대감거리에서 타야한다.
채선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고 이를 앙다물었다. 여기서 지면 정말 공수가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공수가 터졌다는 것은 몸주신이 내렸다는 증거다. 그리되면 작두 위에서 펄쩍거려도 발바닥은 흔적없이 멀쩡하다.
-안돼. 그럴 순 없어.
채선은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하늘을 향해 솟은 채 흔들리던 신대 두 개가 작두단 양옆으로 옮겨오고 곧 작두까지 세워졌다. 단 위에서 퍼렇게 날을 세운 작두가 어둠을 자르는 것을 노려보며 채선은 의식 저편에 아직도 남아있는 빛줄기를 보려 눈을 사려떴다.
아, 보였다. 다시 갈지붕이 보였다. 마당 한 가운데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고수가 앉아 있아 있는 것도 보였다.
채선은 소리를 내보려고 용을 썼다. 심청이 아버지를 기다리며 부르는 소리를 내보려고 용을 썼다.
-이러면 작두를 타야한다, 작두를.
녹초가 되려는 몸을 안간힘으로 지탱하며 가슴을 쳤다. 차라리 항복해 버릴까. 안 된다. 나는 무당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지 무작정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였다. 무당 하나가 나오더니 채선의 몸에 입혀졌던 것들을 확 벗겨냈다. 복대가 벗겨지고, 철릭이 벗겨지고, 붉디붉은 저고리가 벗겨져 나갔다.
남은 것은 하얀 갑사 속치마저고리 뿐이었다.
“자, 시작하자.”
채선은 밀리듯 작두단을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낮아진 반주소리는 더욱 낮아지고 피리 소리만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제발….
하얀 천이 깔린 계단을 밟으며 채선은 고수의 얼굴을 보려고 마지막 용을 썼다. 작두에 오르기 전에 나타나지 않으면 모든 게 끝장이다.
아, 한 발만 더 오르면 작둣날이 기다리고 있다.
발 하나를 작둣날 위에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번쩍, 하고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둥그스름한 윤곽, 끝이 약간 치켜올라간 눈썹, 꼬리가 살짝 처진 눈.
-아, 아버지….
“아이고 아버지이!”
입에서 소리가 터져나오자 채선은 두 손을 아랫배를 누르며 허리를 접었다. 끈끈하고 찍찍한 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연이어 터져나왔다.
“아버지이! 불효자식 청이는 남경장사 선인들에 삼백석에 몸이 팔려 오늘 인당수에 제수로 가옵니다.”
장만신의 눈이 벼락 맞은 대추마냥 사방팔방 휘달리고, 원려의 입도 번개맞은 호박마냥 뚱그렇게 벌어졌다.
딱 벌린 입 속으로 목젖이 드러난 월녀를 보며 채선은 조롱기를 담은 미소를 띠고는 두 발을 함께 들어 잣둣날 위로 훌쩍 뛰오 올랐다.
“저, 저, 저년이!”
발바닥으로 서늘하고 예리함 감각이 빗금처럼 느껴지는가 했는데 작둣대를 감싼 하얀 천이 터지듯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애, 내렷!”
작둣날 위에 풀쩍풀쩍 뛰는 딸을 혼이 빠진 채 바라만 보고 있는 월녀를 향해 장만신이 소리쳤다.
“이 년! 이년이 미쳐도 더럽게 미쳤구나.”
채선을 끌어내린 월녀가 통곡을 했다.
“한 곳을 당도허니 이난 속 인당수라. 광풍이 대작허고 파도가 뛰넘고 어룡이 싸우난 et 대천바다 한가운데 노도 잃고, 닻도 끊쳐 용총줄 끊어져 키 빠지고 바람불제.”
“이, 이년이 그래도!”
벌겋게 피를 흘리면서도 소리를 멈추지 않는 딸을 향해 월녀가 시퍼런 월도를 치켜들었다.
“두게! 그냥 두어!”
꽹과리를 든 장만시니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선 헛웃음을 실실 웃어댔다. 그녀의 등 뒤로 찍어놓은 손톱같은 그믐달이 서천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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