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소릿고2편 #30

-제5장 득음의 길(2)

by 취중진담

발행일:2026. 03. 30. pm8:00


<전편노트>

다시 하나가 된 두 사람은 두 사람의 깊은 속내를 기탄없어 나눈다. 나라 안 최초의 여명창을 만들어 내기 위한 재효의 요구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지워내고 예인이라는 근원으로 돌아가 시작하자는 것이었고, 채선은 스승 재효의 요구에 기꺼이 따르기를 원한다고 대답한다.

드디어 득음으로 향하는 관문이 제대로 열리는 것이다.


제 5장 득음의 길(2)


득음의 길

가을이 갔다. 재효의 북채는 닳아서 반질거렸고 채선의 부채는 귀가 낡아 너덜거렸다. 북채를 잡은 재효의 팔은 들어올릴 수 없었고, 허리는 곧추세우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채선의 목소리 역시 너덜거리는 부채처럼 갈라져 때로는 나오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실망하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명기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망치질과 담금질이 있어야 하는지 아는 두 사람이었다.

하루하루 연습에 목숨을 걸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았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산을 올랐다. 바위를 뚫고 내리는 작은 물길 앞에서는 낮고 가는 소리를, 허공을 가르며 내리꽂는 폭포수 앞에서는 피를 토하는 우렁찬 소리를 뽑아올렸다.

그렇게 채선의 목청은 노래의 구비를 따라 흐르며 석간수가 되기도 하고 천 길 폭포가 되기도 했다. 광활한 들처럼 넓어졌고, 천 길 수심처럼 깊어졌다. 채선은 넓고 깊어지는 자신의 목청이 스승 재효의 살과 뼈와 피와 땀을 파먹은 결과라 굳게 믿었다.

뿌리도 모르는 계집 하나를 위해 노구를 보살피지 않는 스승에게 보은할 길은 이 나라 치고 명창이 되어 천하를 농락하는 일이라 믿고 또 믿었다.

어느 아침이었다.

눈을 떴을 때 채선은 깜짝 놀랐다. 창호문이 희푸르게 밝아 있었다. 늦잠을 잔 것이다. 채선은 후다닥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호통을 치고도 남을 것이었다. 이렇게 날이 다 밝아 올 때까지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실까.

호롱을 밝히자 구석자리에 있어야 할 요강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세숫물이 담긴 놋대야갸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문을 확 밀었다.

채선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먹만한 눈송이가 푹푹 떨어지고 있는 마당 한가운데 재효가 북을 앞에 놓은 채 정좌하고 있었다.


“스…승님.”


눈을 소복이 덮어쓴 작은 체구가 마치 설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일어났느냐?”


입술 위에 올라앉았던 눈송이가 후드득 떨어졌다. 채선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무엇을 그리 미안해하느냐. 늙으면 이렇게 잠이 없어지는 것을.”


재효가 곁에 놓인 부채를 훌쩍 던졌다. 허공을 날아오는 부채와 함께 어깨 위에 올라앉았던 한 덩이의 눈이 또 부서져 내렸다.


“지나간 잘못에 매이지 마라. 일어났으니 시작을 하면 될 것을. 대신, 다시는 잘못하지 말아라.”


입술이 얼었는지 발음이 정확치가 않았다.


“그래, 오늘은 무엇을 하려느냐?”


스승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설인처럼 꼿꼿이 앉은 재효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마를 찌푸려 모았다.

내리는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앉은 사내의 등이었다.

조금만 더….

촉수를 모으자 영상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사내는 하얀 도포를 입은 채 정좌하고 있었다. 앞에는 북이 놓였고 북채를 잡은 손등에는 검버섯이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채선의 눈이 재효의 손등으로 가 꽂혔다.

자기도 몰래 뒷걸음이 쳐졌다. 설인처럼 앉아 북채를 잡은 스승의 손등에도 검버섯 몇 개가 듬성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영상 안으로 무언가가 걸어오는 듯 하다가 쭈볏 섰는데 그만 자신을 보더니만 마구 달려와 몸을 휘어감는 것이었다.


-이년아! 이년. 니년이 미치지 않고 이러지는 못한다.


쪽을 반듯하게 진 아낙이었다. 아낙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느네 어느 순간, 차갑고 예리한 감촉이 발바닥에 느껴졌고 그 감촉 사이로 아릴 듯한 통증이 온 몸으로 퍼져 올랐다.


-거기서라 이년. 네 년이 그렇게 도망을 간다고 내가 못 잡을 줄 아느냐 이년!“


그악하게 소리지르며 달려오는 아낙을 뒤로하고 어딘가를 향해 뛰고 또 뛰는 자신이 보였다. 허공에서 흰 갑사천이 자신을 향해 너풀거리며 따라왔다. 호위라도 하듯 천은 달음박질에 맞춘 속도만큼 날아왔다. 숨은 턱에 차고 의식은 가물거릴 즈음, 어디선가 너울이 밀려왔다. 너울 속으로 자신이 걸어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흰 갑사천도 너울거리며 주위를 돌았다.

채선은 쓰러지고 말았다.


-아가, 아가 괜찮은 게냐?


아득히 눈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구나. 있는 힘을 다해 눈꺼풀을 밀어올리려 했으나 천 근 돌덩이를 매단 듯 눈꺼풀은 꼼짝하지 않았다.


-채선아, 아가 채선아!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제 이름이 채선인가요?


-그래, 니 이름은 이 아비의 성을 받아 진채선이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환해졌다. 어릴 때 같이 놀던 금파도 생각났고, 정월 대보름 무렵이면 어디서 왔는지 몰려오는 또랑광대를 따라 뛰어놀던 것도 생각났고, 신당에서 종이옷을 접던 것도 떠올랐고, 물지게를 지고 염정으로 나간 아버지를 마중나간 것도 떠올랐고, 자신을 세습무로 만들려던 어머니 월녀도 떠올랐고, 어쩔 수 없이 장만신 집에서 머물며 내림굿 준비를 한 것도 떠올랐고, 굿당굴에서 신을 받던 것도 떠올랐다. 혹여나 자기도 몰래 공수가 터질까봐 이를 악물고 흥보를 부여잡고, 배비장을 부여잡고, 심청을 부여잡고, 춘향을 부여잡은 애타던 심정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결국 장만신과 무당들과 악사들과 어머니 월녀의 힘에 밀려 작둣날 위로 올라갔으나 심줄처럼 잡고 있던 이 나라 최고 명창이 되려는 집념이 작둣날로 하여금 발바닥을 그어 버리게 했고, 사방이 피로 물드는 것을 본 어머니 월녀와 장만신이 넋을 놓은 틈을 타 산을 달려 올라간 것도 떠올랐다. 밤을 새워 산을 넘고 또 넘어 바다에 닿은 것까지는 생각났건만 그 후론 하얗게 지워져버렸다.

아, 내 이름 진…채…선.

일순, 눈이 번쩍 떠졌다.

채선은 훌쩍 일어나 앉았다.


”스승님, 저는 지금 별주부전 계변양류편을 해 보고 싶습니다.“


입술을 앙다문 채선을 본 재효의 표정이 어리둥절했다.


”괜찮은 게냐?“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괜찮습니다.“


재효의 걱정어린 시선을 받으며 부채를 집어올렸으나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쩌자고 이 저주 받은 기억은 돌아왔단 말인가.

잊을 것이다. 이름도 잊고 세습무의 딸이라는 것도 다 이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계변양류편을 불러야 한다.

계변양류는 주술이다. 별주부가 땅 위로 나가 토끼를 만나기 위해 온 정성을 다해 비는 주술이다. 사지는 파김친양 널브러지는 듯 했지만 이를 악물었다.


”저는 스승님, 꼭 계변양류를 해야 합니다.“


”그래, 그렇게 하여라.“


채선의 얼굴에 드리운 혼란을 그대로 알아차린 재효는 북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별주부가 토끼를 만나기 위하야 제단을 배설해 놓고 비는디! 계변양류 늘어진 산과 목실을 주워다가 방위가려 갈라놓고 은어 한 마리 잡어내아 어동육서로 꾸며놓고 지성으로 독촉을 하는구나.“


”허이!“


”유-세차 갑진 오월 갑진삭 임자 초구일 남해 수궁별주부 자라 감소고우 상천이리월 성신후토 명산신령님 전 지성봉축 하나이다.“


”얼씨구!“


”용왕이 우연 득병하야 천의 도사 문병 후에 토끼 간이 약이라 하오니, 산중 토끼 한 마리만 내려주시길 천만축원 근이청작 상사 상향.“


비손하는 대목이 오자 목구멍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해서 소리느 ㄴ잠시 쉬고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바닥을 비벼댔다. 비비고 비비고 또 비볐다. 제발 돌아온 기억이 다시 사라지길.

그래서 스승과 함께 하는 이 길에 걸림이 되지 않길.


”토끼를 만나게 해….“


겨우 목을 추슬러 소리를 시작했을 때였다. 날카롭고 거친 무엇인가에 난자당한 듯한 통증이 목구멍을 후벼팠다. 채선은 목을 감싸쥔 채 데굴데굴 굴렀다.


”토끼를!“


그러면서도 소리를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대로 소리를 멈추어버리면 또다시 세습무의 딸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토끼를!“


”그만! 그만 그쳐라.“


재효가 채선을 끌어안았다. 그리곤 울먹거리며 말했다.


”아가, 나는니가 해낼 줄 알았다. 너는 타고난 목청이었음에도 소리가 조화롭지 못했다. 떡목과 굳은 목이 섞여 있어서 그랬다. 오, 관세음보살!“


채선은 행복했다. 천구성을 얻었다는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안겨보고 싶었다. 스승의 품이 오롯한 자기 것이 되기를 피를 토하며 기다렸다.


“스승님!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픈가요?”


목을 감싸쥔 채선을 바라보는 재효의 표정은 감격, 그 자체였다.


“목구멍을 헤집는 듯이 아플 것이다. 그것은 떡목과 굳은 목이 찢겨나갈 때 생기는 통증이다. 이제 되었다. 이제 너는 드디어 득음의 문 앞에 다가선 것이야.”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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