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는 왜 그럴까?

시모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시모의 속마음 6가지

by 인마니

1. 가장 익숙한 사람의 행동을 닮는다


시모들은 왜 자기 정도면 괜찮은 시어머니라고 생각할까요? 내 시어머니가 한 거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그다음 행동으로 옮긴다고 믿지만, 사실은 행동을 먼저 하고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입니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동물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집단입니다. 일단 자신이 가장 많이 보고 들었던 행동을 무의식 중에 따라 합니다. 명분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익숙한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나쁜 행동도 쉽게 따라 하고, 심지어 감정도 따라갑니다. 폭력적인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는 대부분 폭력적인 성인이 됩니다. 상대가 혹은 자녀가 맞을 짓을 했을 뿐이며, 그게 상대를 위한 일이라고 강하게 믿으면서 살죠.


시모의 폭언과 학대를 감내했던 며느리는 대부분 비슷한 시모가 됩니다. 자신이 며느리를 대하는 행동이 과거의 내 시모만큼 고약하지 않다고 믿는 건 사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는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허용하는 수준이 달라졌기 때문이지, 본인이 스스로 자중하고 노력해서 얻은 결과는 보통 아니라는 것이죠.


미디어의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 드라마를 통해 시어머니 상을 내재화할 수 있는데, 극단적인 갈등을 만들고 상황을 과장하는 드라마 속의 인물들을 자신도 모르게 배우는 겁니다. 내 의식은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악역을 연기한 배우의 등짝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현실에서 느끼는 것처럼 무의식 한편에서는 그걸 현실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뇌는 일반적으로 생각과 현실과 픽션을 구분하지 못하고, 의식 밖에서 일어나는 내재화를 물리적으로 막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막장드라마를 줄이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2. 알아서 기는 사람에게 굳이 예의를 차려야 할까


익숙한 모습을 내면화하고 관습대로 사는 건 며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보이려고 애를 쓴다는 건 나를 평가해 달라는 뜻입니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평가를 원하는 며느리를 평가했을 뿐입니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낮추면 사람이 하찮아 보입니다. 뭐든 다 해줄 것처럼 구니 뭐든 요구하는 거죠. 낯선 타인이라면 의심하고 경계할만한 행동이지만 시가에 대한 며느리들의 자발적인 자기 낮춤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저 괴롭혀도 안전한 대상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할 뿐입니다.


나를 평가하지 않도록 하려면 애써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일관성 있게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친절도 담백하게 해야 합니다. 시모를 악마화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폭언에 흔들리지 않고 칭찬에 흥분하지 않아야 상대가 나를 동등한 존재라고 인식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3. 아들은 남편의 대체재다.


아들에 대한 엄마의 집착은 엄마에게 남편이 없거나 부부 관계가 나쁠수록 심합니다. 아들이 어릴 때부터 아들을 남편 대용으로 삼지만 그게 자식 사랑이라고 믿고 삽니다. 이런 분들에게 며느리의 자리는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성적 파트너가 되거나 아이를 낳아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어준 자리일 뿐이죠. 며느리는 그저 젊다는 이유로 아들을 만나 아들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성생활까지 누리며 아들에게 기생하는 존재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들의 동조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남편 대용이 되길 엄마만 일방적으로 요구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어린 시절,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집안이 늘 불안하고 공포에 휩싸인 상황이었다면, 아들은 엄마에게 극단적으로 의존하고 심리적으로 강하게 밀착할 수 있습니다. 친구나 애인 혹은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도 하죠. 일종의 공생관계인데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한 뒤에도 습관처럼 이 관계를 유지하려 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요구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안정하고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결혼생활에서 어린 시절 경험했던 심리적 안정을 다시 엄마를 통해 찾으려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들은 그것이 단지 효도라고 믿고 살 따름이죠.


비슷한 의미에서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보통 딸의 남성 파트너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노골적으로 질투와 경계심을 드러내도 문화적으로 기꺼이 용인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반면, 사회는 아들의 여성 파트너에 대한 어머니의 질투를 잘 허용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딸에 대해 남성의 역할을 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남성은 쉽게 드러내지만, 엄마는 아들에 대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것을 쉽게 드러낼 수는 없다는 거죠. 엄마의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사회적으로도 스스로도 압박하는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아들의 파트너를 미워할 수 있는 구실을 자꾸 찾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널 나무라는 건 질투가 아니라 니가 며느리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다.’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니 불필요한 트집을 더 반복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죠.



4. 모성 찬양에 따른 보상 심리


반려견은 여성이 산책시킬 때 훨씬 많이 짖는다는 걸 아시나요? 남성 보호자에 비해 산책길에서 참견하고 공격하는 주변사람들이 많아섭니다.


아이 산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아빠는 유모차만 끌고 나가도 그 자체로 칭찬받지만, 젊은 엄마는 아이가 입은 옷자락 하나에도, 유모차를 끄는 방식 하나에도, 심지어 아기의 생김새를 갖고도 낯선 사람들에게 온갖 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양육방식 역시 아이를 자유롭게 두면 방치라고 하고, 교육에 매진하면 애를 잡는다고 합니다. 엄마의 역할을 절대적으로 두고 성역화하기 때문인데, 불필요한 스트레스까지 다 짊어지고 애를 키울 수밖에 없죠. 스스로도 편하게 있으면 좋은 엄마가 아닌 것 같아서 하다못해 청소라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더 합니다. 쓸데없이요. 엄마의 역할은 자녀가 결혼을 해도 끝나지 않고 손주를 봐줘야 한다는 강박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모성 강박 때문에 힘들게 살았지만 결국은 보상심리가 작동하고 모성 찬양에 안주하려 합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난 엄청난 희생정신으로 널 키워낸 사람이다, 보상받아 마땅하다 라는 맘부심이 끓어오르죠. 그리고는 온갖 신호를 보내며 날 행복하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양육 과정에서 엄마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정작 아이가 아니라는 걸 엄마는 애써 지워버립니다. 가장 만만한 대상에게 날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아들보다는 어느 날 갑자기 그들 사이에 끼어든 며느리가 희생양이 되길 바라죠. 어쩌면 시모는 계속해서 보상받기 위해 지속적으로 며느리를 문제시하고 애써 정을 주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며느리가 문제가 없으면 내가 문제인 거고, 정을 주면 죄책감을 갖게 되니까요.



5. 여성의 여성 혐오


조선시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어떤 서구의 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본 첫 풍경 안에 가축이 살 것 같은 초가집들이 있었고, 이곳에서 남자들은 죄다 밖에 나와 놀고 있고 여성들만 죽도록 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근원적으로 조선의 여성은 남성의 노예였고 부속물이었습니다. 아들을 가지면 신분 상승을 하고 며느리라는 어린 여성 노예를 둘 수 있었죠. 21세기에 웬 조선 타령이냐고요? 조선시대나 일제시대에 혹독한 시집살이를 한 사람을 시어머니로 모셨던 분들이 현재 생존해 있기도 합니다. 생각보다 멀지 않은 얘기라는 뜻이죠. 불과 한 세대도 제대로 건너뛰지 못했는데 500년 넘게 이어온 빡센 시월드 유전자가 단숨에 사라지길 기대하는 건 진화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요즘은 흔히 ‘남녀갈등’이라고들 하지만 보통은 여자도 여자가 만만합니다. 난 노예로 살았는데 시대가 바뀌었다고 며느리들이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니 눈꼴사나울 수밖에요. 아들이 밖에서 힘들게 번 돈이나 축내는 기생충 같은 존재인데 말이에요. 만약 며느리가 능력이 좋아서 아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경우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돈 잘 버는 노예는 칭찬받는 존재일 뿐 주인으로 단번에 신분 상승이 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돈 잘 버는 노예는 주인의 주머니를 채워줄 때만 가치가 있으며, 주인의 주머니를 채워주지 않는 고스펙 노예는 괘씸죄로 더 강력한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6. 권력을 통한 인정 추구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권력에 대한 욕구라고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매순간 수많은 선택을 하고, 가족 안에서도 중요하든 사소하든 선택을 주로 누가 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위치가 이동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시어머니의 권력 추구는 일종의 ‘강자 동일시’에서 출발합니다. 모자일체라고 할까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대체적으로 약자로 살아온 엄마들은 물리적으로 강자이며 사회적 위치가 더 높다고 혹은 더 높아질 거라고 여기는 아들에게 주로 자기 동일시를 합니다. 과거 오랜 기간 부모들이 아들을 극단적으로 선호했던 것도 어찌 보면 권력욕과 자기 이익에 따른 철저한 계산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아들의 ‘쓸모’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권력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하는 욕구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흔한 정서로 통합니다. 극단적인 경쟁사회이고 뿌리 깊은 서열사회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며느리를 상대로 한 시어머니의 ‘힘’이라는 것은 우회한 것이며,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모는 늘 불안하고 내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증명하려 하고 확인하려 할 겁니다. 스스로 내려놓지 않는 한 상대가 할 수 있는 것은 굴종 아니면 손절뿐입니다.


원래 미개한 사회일수록 약자들끼리 싸웁니다. 약자들이지만 그 사이에도 엄연한 권력관계가 존재하고 그래서 고부갈등보다는 ‘시모 갑질’이라는 표현이 사실 더 현실적입니다.


안타깝게도 역사적으로 기득권이 스스로 먼저 각성해서 순화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약자인 자가 저항해야 지긋지긋한 대물림과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아주 많이 어려운 줄 압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혁명이라는 게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