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남성의 적이 여성이라면, 여성의 적도 여성이다

by 인마니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들 합니다. 여성들이 유독 질투가 많고 서로 친구가 되지 못한다는 뜻일 겁니다. 유래가 무엇이건 남성에 비해 생각이 얕고 천성이 상스럽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사실일지도 모르죠. 적의 기준을 객관화할 수 없고 수치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니 증명할 수 없는 문화적 표현일 따름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비해 남성들의 연대가 유난히 끈끈한 것도 사실이긴 하죠. 왜일까요?



1. 본능을 거스르는 여적여? 자연계는 남적남인데


일반적으로 자연 생태계에서는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컷들이 목숨을 불사하는 경쟁을 벌입니다. 수컷 공작새의 꼬리가 생존에 불리함에도 크고 화려하게 진화한 것이, 암컷의 선택을 받기 위한 동성 간의 경쟁 때문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알파메일이라 불리는 우두머리 수컷이 대다수의 암컷을 차지하고, 통상 90% 이상의 수컷들은 평생 단 한 번도 암컷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사멸됩니다.


반면 암컷은 교미 상대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 선택과 권한 역시 온전히 암컷에게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암컷이 질 좋은 유전자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수컷을 선택하고, 그 수컷을 다른 암컷들과 공유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암컷 간의 자원 경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성적 선택권이 보장되니 상대적으로 싸울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죠.


‘여적여’는 다윈의 성 선택 이론에 역행합니다. 만약 더 나은 성적 자원을 얻기 위한 경쟁과 불화가 여성들에게만 일어난다면, 이는 인간사회에서 성적 선택권이 오로지 남성에게 있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이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훨씬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쓰는 건 여전히 남성들입니다. 그게 요즘 젊은 남성들의 불만이기도 하구요. 미국의 66개 도시 소비 행태를 분석하니 남자가 더 많은 지역일수록 남자들의 과소비가 심했다고 합니다. 짝짓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여성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상대 이성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분노를 표출하는 쪽 역시 훨씬 많은 비율로 남성입니다. 자연계처럼 극단적인 쏠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선택권이 여성에게 기울어져 있음을 체감할 수 있죠. 진화론적으로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남성은 번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빈도에 집착하고 더 많은 여성과 짝짓기를 하려고 하죠. 반면 아이를 직접 낳아 길러야 하는 여성은 더 안정적이고 풍부한 자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질적인 선택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성 선택의 쏠림이 동물계처럼 극단적이지 않은 건 인간사회가 도입한 일부일처제 때문일 겁니다. 누군가의 첩이 되지 않기 위한 여성의 인권 맞춤형 제도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최재천 교수와 같은 진화생물학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농경사회 이후 권력을 쟁취한 남성들이, 내 여자가 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든 제도일 거라는 겁니다. 인간은 발정기가 따로 없고 여성의 배란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내 여자가 낳은 아이가 내 아이일 확률을 높이기 위해 여성을 제도적으로 묶어두겠다는 거죠. 이렇게 일부일처제로 인해 소수의 잘난 남자가 여자들을 독점하는 게 어려워졌고, 상대적으로 많은 남성들이 여성과 짝짓기할 기회를 갖게 되었죠. 여성의 입장에서는 더 우월한 유전자를 나눠가질 기회를 오히려 잃게 된 셈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부 남성들은 여전히 이 ‘분배’ 문제에 불만이 많습니다. 캐나다의 임상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강제적 일부일처제(enforced monogamy)’를 주장합니다. ‘성적 엘리트’가 우위를 점하면 세상이 건전하지 못하고 성애 자본이 부족한 사람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으니 우두머리 수컷도 한 명의 여성과만 성생활을 하도록 문화적 강제를 하자는 겁니다. 그래야 상대적으로 매력이 떨어지는 남성들이 더 많은 여성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죠.


여성을 일종의 배분할 자원으로 본 것이고, 현실성이 없는 전체주의 수준의 분배 전략으로 보이지만, 뭐 선택권의 쏠림을 막자는 하나의 의견이니 일단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치죠. 근데 이처럼 짝짓기의 기회를 두고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고 사회적으로 강한 불만을 제기하는 것도 여전히 남성들인데, 왜 여성과 여성만 적이라고 할까요.



2. 여자도 여자가 만만하다, 약자니까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모계사회였다고 합니다. 남성이 강자로 군림한 것은 농경사회가 시작된 약 6천년 전부터라고 추정합니다. 문명의 시간이었던 6천년을 남성중심사회로 살아온 것인데, 최근 10~20년 사이에 한국에서만 이 구도가 여성 중심으로 뒤집혔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진화론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안타깝게도 사회 고위직의 성별 비율이나 급여 수준, 성범죄 등 많은 통계를 감안하면 아직까지는 여성이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능력에 따른 차등이건, 짊어진 책임이나 의지의 차이이건, 구조적 차별 때문이건, 무엇이든지간에 말이죠.


‘여왕벌 신드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직 내에 여성 리더가 자신의 권력을 다른 여성과 나누지 않길 원하고, 오히려 남성 직원을 편애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독일의 한 연구에서도 여성 상사와 일하는 여직원이 남성 상사와 일하는 여직원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겪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국내에서도 많은 여성 직원들이 여성 상사와 일하는 것에 대한 고충을 호소하고 있고, 직장에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 피해자가 여성 CEO에 의해 해고되는 일도 곧잘 벌어지곤 하죠. 일종의 ‘여적여’ 현상입니다.


이 연구진이 설명하는 여왕벌 신드롬의 원인은 단순합니다. 남성 위주의 직장에서 어렵게 고위직에 오른 여성이 여성 직원만 편애한다는 인식을 갖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여성에게 할당된 자리의 좁은 한계성 때문에 다른 여성을 쉽게 경쟁자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적어도 우리 여자 부장님이 ‘남미새’여서는 아니라는 뜻이죠. 여성의 신분 상승을 가로막는 유리 천장은 이렇게 다른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여자의 적이 여자인 사회라면 여성이 여전히 사회적 약자라는 뜻도 됩니다. 내가 여잔데 누군가와 싸워야 한다면 당연히 이길 수 있는 상대를 고르려 할 겁니다. 회사에서 내부 고발이 일어났을 때 일반적으로 직원들이 사장님 편 들지, 동료 편 들지 않잖아요. 그냥 쎈 편 들고 약한 편 까는 겁니다. 그게 내 생존에 유리하니까.


또한 ‘여적여’는 여성과 남성이 대치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더 자연스럽게 성립합니다. 남성이 강자로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욕구를 드러낼 때 여성들이 약자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남성들이 여성을 공격하고 여성들도 여성을 공격하는 것이 결국 ‘여적여’의 본질이 되는 겁니다. 남녀가 동등하다면 굳이 성별에 따라 적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약자를 고르면 됩니다. 가난한 자, 못배운 자, 힘없는 자, 저항 못하는 자, 지금까지 우리가 늘 해왔던 식으로요.


남성은 적이 없고 누구도 적대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만약 그 분이 남성이라면 여성을 비하하거나 공격할 때 쓰는 ‘여적여’라는 단어를 사용해선 안 됩니다. 이런 표현 자체가 여성을 적으로 간주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남성은 적이 없다’가 아니라 ‘성별에 따라 적을 나눌 수 없다’라고 표현해야 남성의 무적론이 비로소 완성됩니다.



3. 고부 갈등은 ‘여적남’이다


‘여적여’ 논리의 최전선에 있는 것이 아마도 고부관계일 겁니다. 일상 전반에서 충돌이 벌어지며, 가정을 파탄내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직장 상사는 상대적으로 약한 고충일 수 있죠. 여왕벌 신드롬의 양상이 견제와 차별이라면, 시모와의 갈등 요인은 끊임없는 간섭과 통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 차이도 부모뻘이고, 사회적 문화적으로 더 강한 위계의식을 고부가 함께 갖기 때문에 갈등이 증폭되기 훨씬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한국사회에서 ‘여적여’를 강조하는 것도 어쩌면 그 뿌리가 유난스러운 고부갈등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고부를 반드시 여성 대 여성 관계라고만 해석하기 좀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자리가 아들(남성)을 등에 업고 오른 권좌이기도 하지만, 시모의 몸 안에 남성의 성염색체인 Y염색체가 있다면 생물학적으로도 남성이라고 해석될 여지마저 있으니까요.


2012년 실제 한 연구에서 59명의 사망한 여성 뇌조직을 분석한 결과, 무려 63%에서 Y염색체 DNA를 검출했다고 합니다. 이는 사실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며 ‘마이크로키메리즘(Microchimerism)’이라 불리는, 학계에서는 잘 알려진 현상입니다. 한 개체 안에 유전적으로 다른, 소량의 세포가 존재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것이 산모와 태아 사이의 세포 교환이라고 합니다. 물론 엄마의 세포가 태아에게 이동하는 것은 아주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태아의 세포가 엄마에게 이동하는 ‘태아 미세 키메라’는 다소 충격적인 연구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의 세포가 태아를 통해 아내에게 이동한다는 뜻이 되거든요. 그래서 부부가 살면서 서로 닮아가는 걸까요.


뿐만 아니라 산모에게 이동한 태아의 Y염색체는 몸 안에 평생 존재하기도 하지만 중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모양입니다. 사망한 여성 63%에서 Y염색체가 나왔다면, 나머지 37%의 여성도 살아생전 몸 안에 Y염색체를 가졌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2012년 조사는 뇌의 일부 조직에 국한했으니, 뇌의 남은 다른 부분이나 혈액, 간, 폐, 갑상선 등 다른 조직까지 전반적으로 검사했다면 100%의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성의 몸에 Y염색체가 있다고 해도 그 정도가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 외모가 눈에 띌 정도로 남성적으로 변한다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고, 정서나 인지 변화가 있는지 역시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아들을 임신했거나 출산한 경험이 있는 여성은 어떤 측면에서 물리적으로 남성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있다는 것이죠. ‘아들의 엄마는 남자다’라는 은유적 표현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셈입니다. 이제부터 시모를 “아버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4. 수직적 남성관계 vs 수평적 여성관계


우리 사회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유난히 연대를 더 잘합니다. 태생적으로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 나서일까요? 농경사회 이전, 인류 역사의 거의 모든 시기에 걸쳐 수렵생활을 하고, 다른 집단과 경쟁 혹은 전쟁을 해야 했던 남성들은 진화심리학적으로 집단행동에 특화돼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양육 중심의 정서적 유대를 중요시했던 여성과는 분명 차이가 있죠. 군대와 기업, 스포츠팀과 같이 역할 분담이 명확한 위계 구조에 훨씬 더 익숙하다는 것도 연대의식이나 동료의식을 높이는 데 분명 기여한 면이 있을 겁니다. 특히나 남성 중심사회에서 강조되어 온 ‘형님 문화’나 ‘회식 문화’가 남성 간 네트워크를 더 강화시키는 데 크게 일조했을 것이고요. 가정 밖에서 남성이 사회적 짐을 더 짊어지기 때문에 조직사회에 대한 적응이나 동조 강박을 더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한편에서 남성 폭력에 대한 남성의 만성적인 두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남성 폭력의 희생자가 여성이기만 한건 아니며, 피해 정도는 상대적으로 작을지언정 그 빈도는 남성이 훨씬 많고 폭넓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남성들은 통상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여성처럼 겉으로 강하게 드러내지 못합니다. 다른 남성에 대한 공포감을 노출하는 것은 스스로 약자임을 시인하는 꼴이며, 남성성을 잃은 먹잇감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여성들에게 매력이 없어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남성들과 더 연대하는 겁니다. 한명이라도 더 내편을 만들어 집단화를 통해 힘을 얻고, 또 다른 남성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남성성도 지키고 안전을 추구하는 거죠. 또한 사회적 지위가 높은 형님들을 통해 기회를 얻고자 하는 이익 추구의 목적도 있을 겁니다. 유전학적으로 남성성은 남자에게 생존과 번식의 문제이고, 이 남성성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해서 공동체 내의 남성간 갑질이나 형님들의 폭력까지 다 참아내곤 합니다. 그리곤 이게 사회생활의 정석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반복하죠. 그런데 사실 여성들은 겁먹은 남성보다 집단화된 남성을 더 싫어합니다. 남성성을 지키려는 것은 번식을 위한 선택인데 번식에서 오히려 더 멀어지는 길을 택한 셈입니다.


여성의 경우는 어떨까요? 여성은 생존과 양육을 위해 사회적 협력은 중요시할 수 있지만 더 강력한 집단화에 목을 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게 딱히 내게 이익을 주지 않기 때문이죠. 연대한 여성이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날 지켜주지도 않으며, 작은 파이를 두고 경쟁하는 여성 선배나 상사가 날 신분 상승하도록 이끌어주지도 않습니다. 여성들이 집단으로 몰려다닌다고 딱히 여성성이 강화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여성적 매력이 떨어져 보일 수 있죠. 그래서 갑질에 저항하는 것이 비교적 쉽고, 수직적 구조에 맹목적으로 순응할 이유도 없는 겁니다.


어쩌면 이게 문제일 수 있습니다. 보수적인 사회는 위계와 질서를 중요시하는데 여성들이 말을 듣지 않는 거죠. 물리적 힘도 사회적 힘도 없는 고만고만한 여성인간들끼리 서로 복종해서 뭘 얻겠어요. 여성사회에도 서열을 매기고 위계를 부여하려면 더 큰 권력의 파이를 내줘야 합니다. 과연 남성사회가 용납할까요? 철저한 위계사회에서 위계가 없으면 혼란이 옵니다. 위계사회지만 완벽한 위계가 불가능하고, 영원히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평화를 얻으려면 개인 사이의 위계가 사라져야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시어머니는 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