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인생드라마가 이토록 불편한 이유
‘인생드라마’라는 단어가 <나의 아저씨> 이전에도 이렇게 많이 사용되는 단어였나요? “내 인생드라마다”라는 유행어 같은 워딩으로 애정을 드러내는 말과 글들을 지난 몇 년간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니 사람들이 감동받은 포인트가 무엇인지 새삼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정주행 해봤습니다. 그리고 다시 불편해졌습니다. 사실 저에겐 상당히 안타까운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드라마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프랑스 ‘르피가로’는 <오징어게임2>를 비평하면서 K-드라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줄거리는 텅 비었지만, 대체로 묵직하고 여전히 짙게 남아있는 반공 프로파간다의 가치와 극한 악감정의 묘사라는 측면이 교화적인 자극을 주는 픽션의 장르”라고요. “제작자가 절제의 선을 넘지 않도록 과도하게 경계하는 영미권 드라마와 달리, 한국드라마는 일반적으로 낭만도 전투도 호러도 종말론도 거의 발작적이다”라고도 적었습니다.
드라마가 그렇지 뭐. 드라마 속 세상이 너무 좁아서 지나치게 남발되는 우연성과 만화처럼 과장된 캐릭터와 감정 과잉, 흑백 논리로 점철된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뭐 큰 개연성을 기대하겠느냐마는. 두 주인공인 지안과 동훈이 서로를 인지하는 계기가 되는 ‘뇌물 5천만원’ 말이에요. 그게 검은 돈이건 흰 돈이건 만약 현실에서 “5천만원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건가요? 거짓말을 하고 있다거나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의심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동훈을 향해 무한대의 이해와 감동스러운 ‘엄지척’을 사정없이 날려줍니다.
“통크네”, “돌려보낼 곳을 몰라서 버렸겠지”, “괜히 착한 사람 애먹이고”, “대박! 폼봐봐. 도도해.” “자네 때문에 요즘 기분이 좋아.”, “내가 밥 한번 산다 그래”, “형 좋아해서 훔쳐다 버렸네.”
실수로 잃어버린 게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에 대해 아내 윤희가 그럽니다. “어떤 등신같은 인간이 실수로 오천을 흘려?” 어떤 면에선 가장 현실감 있는 대사 아닌가요? 근데 거액의 돈을 흘리는 사람은 실제로 있습니다. 거액의 돈을 버리는 사람은 실제로 있나요?
뇌물은 자기 돈보다 더 버리면 안 됩니다. 그냥 받은 게 되기 때문입니다. 버리든 사탕 사먹든 그 돈을 자기 맘대로 처분한다는 건 당연하게도 ‘수취’를 의미합니다. 버린 걸 증명한다고 해도 그 부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정상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의심을 피해갈 방법을 먼저 궁리한다는 걸 사람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인들은 뭔가에 홀린 듯, 동훈이 혼자서 4인조 강도라도 때려잡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입니다. 뭔가 다른 의도가 있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나를 먼저 의심해야 할 상황에서 회사 동료, 후배, 임원, 회장, 동생까지도 그에게 감탄과 이해와 무한 신뢰와 존경과 하트 뿅뿅을 날리고 있습니다. 종교처럼요.
<오징어게임2>의 개연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개연성을 논하나 들여다봤더니, “해병대 출신 남성이 총격전이 벌어진 전장에서 구석에 몸을 숨기고 울고 있다는 게 말이 돼?”라는 불만이었습니다. ‘좋아요’를 왕창 받은 베스트 댓글 중 하나였습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인가요? 5천만 원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이 ‘세상 멋진 사람’이 되는 맥락은 말이 되고요?
대중은 박동훈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드라마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우울하고 불행했던 인물입니다. 본인 입으로 “이번 생은 망했다”고도 했습니다. 막판에는 혼자 밥 먹다가 갑자기 오열하기도 합니다. 정말 박동훈이 되고 싶은가요?
진지하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는 왜 불행한가요? 와이프가 바람 펴서? 외도 사실을 알기 전에는 행복했나요? 내내 궁금해하다가 제가 내린 결론은 하나입니다. 완벽하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그는 전형적인 인정 중독입니다. 엄마와 형제, 친구, 선후배, 동네 형들까지 모두 그를 사랑하고 염려하고 칭찬합니다. 직업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근데 유일하게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 인물이 있습니다. 아내 윤희.
작가가 드라마를 통해 설명하는 박동훈의 불행은 오로지 아내 때문입니다. 이렇게 착하고 의리 있고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괜찮은 남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내는 어리석음의 상징이고 개선되어야 할 ‘악’입니다. 결국 동훈은 자신의 ‘선함’만으로 아내를 깨우쳤고 개선시켰습니다. 해피엔딩이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기러기아빠가 됐습니다. 더 처절하게 외로운 사람이 됐습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어른 박동훈의 성찰은 무엇인가요? 한 인물이 성장하는 건 하이틴물에서나 볼 수 있는 장르적 주제일까요. 작가가 규정하는 어른은 정신적 성장마저 끝난 존재인가요.
안타깝게도 제가 보는 박동훈은 유아기적 사고를 하면서 자신이 어른이라고 착각하는 인물입니다. 주체적인 사유를 하지 못하고 통념적으로 주변인들이 하라는 것만 하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늘 남들이 옳다는 것에만 자신을 꿰맞추며 살아왔는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내에 대한 몰이해가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가 지안과 선을 그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곁을 내주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추앙하고 인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안보일 때 궁금한 것은 여전히 날 인정하는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혹시 아내처럼 자신한테 실망한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심리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안에 대한 감정은 연애죠. 단순히 선의만 가진 사람이라면 시시때때로 떠올리고 보고 싶어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안을 향한 “예쁜 애”라는 발언 역시 자신을 애정하는 것에 대한 보답이거나 연애 감정이거나 둘 중 하나일거라는 겁니다.
한번 상상해보세요. 만약 아내 윤희가 바람피지 않았다면? 바람 상대였던 도준영이 윤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인물이었다면? 아들과 한집에 사는 아빠 박동훈으로 그려졌다면? 아내의 원가족이 드라마에 등장했다면?
퇴근 후 단 하루도 집으로 직행하지 않고 엄마, 형제, 친구들을 만나고, 매일 술을 마시고, 주말마저 조기축구 하러 나가는 남편 혹은 아빠의 모습을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떠올려봐 주세요. 집에 와서도 수시로 소주를 들이켜고, 어떤 질문을 해도 잘 대답하지 않고, 본인 조카 결혼식에 아내가 안 왔다고 삐치고. 장인장모와 처제 혹은 아들이 있었다면 이런 사위, 형부, 아빠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박동훈을 이상적인 인간 혹은 선의 상징으로 신격화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꽤 노골적입니다. 아들을 지우고, 처가를 지우고, 아내의 외도는 오로지 그녀의 이기심과 어리석음 탓이며, 주변의 절대 다수가 박동훈을 무한 신뢰하고, 그를 칭송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악당입니다.
심지어 아들은 스토리상 없어도 되는 존재인데, 굳이 캐릭터를 만들어놓고 조기유학이라는 장치를 만들어 애매하게 지웠습니다. 왜 굳이 아들을 넣었을까요? 박동훈은 완벽한 사람이고, 가장 남자다운 남자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식기능이 부실한 사람처럼 비춰지는 것이 아마도 작가는 싫었을 겁니다.
이 드라마는 명명백백하게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정확히는 불가능성에 가까운 남성 판타지입니다. 지안이 핵심 주인공이라고 느껴지나요? 지안은 동훈을 신격화 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이 부여된 인물일 뿐입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나의 아저씨’가 아니라 ‘나를 나의 아저씨라 부르는 소녀를 만났다’ 정도가 됐어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은 철들지 않는 것을 하나의 남성성으로 받아들입니다. 남성들이 아이가 되고 싶은 건 삶에서 너무 많은 짐을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나와 배우자 둘만 잘 먹고 잘사는 것도 기적적으로 힘든 일인데, 부모와 형제, 친구, 동료, 선후배까지 물심양면으로 빠짐없이 챙겨야 어른 혹은 남자로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방법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니 회피하고 싶은 겁니다. 술 마시고 축구하고 게임하는 게 그렇게 살고 싶어 그리 사는 게 아닙니다. 일종의 게으른 완벽주의고 인지부조화 탓이라고 할까요. 옳지 않다는 걸 알지만 다른 방법을 모르는 겁니다. 무능한 남자가 되느니 차라리 애나 개가 되길 선택하는 거죠.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의 다소 과잉된 자기연민은 그런 연유에서 기인했을 수 있습니다. 다들 하나같이 죽도록 불행하다는데, 저게 저렇게까지 불행할 일인가 의구심이 들다가 조금은 억지로 찾은 결론입니다.
어른이라면 각자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늘 우르르 몰려다니고 놀고 마시고 싸우고 흥분하고 자조하는 건 핑계거리가 필요한 거고 자신이 없어서입니다. 그나마도 현실의 남성들은 실현이 다소 어려운 일이라서 드라마를 통해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해되고 즐거운 일일 수는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끔찍한 건 작가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술집을 운영하며 매일밤을 술과 눈물로 지새우는 정희는 무려 20년 동안 실연한 남성 한 사람에 대한 분노와 원망만을 쏟아내는 인물입니다. 연인이었던 상원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인정하지 않고, 내 뜻대로 하지 않았다고 20년간 화만 내고 있습니다. 사랑인가요?
하필이면 남자가 또 극단적으로 잘난 사람이었습니다. 전교도 아니고 무려 전국 1등?! 초명문대에 진학해서 의사든 판사든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과한 설정이 굳이 왜 필요했을까요? 이건 마치 정희가 잘나가는 사모님이 될 기회를 놓쳐서 20년간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인물이라고 읽힙니다. 어떤 남자를 만나도 성에 차지 않는 거죠.
만약 전국 꼴등에 오징어 같이 생긴 남자였다면? 그럼 사랑인가요? 남자가 어떤 인물이었건 그 부분은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기간이라고 해도 20년을 집착하고 끊임없이 원망을 쏟아내는 건 자학이고 정신병에 가깝습니다.
만만치 않은 문제적 여성은 또 있습니다. 배우 유라. 젊고 창창한 여배우가 촬영기간 내내 수많은 제작진 앞에서 자신을 모욕하고 학대해서 무기력과 트라우마를 깊게 남긴 전감독에게 왜 집착할까요? 그것도 복수가 아닌 사랑의 방식으로. 심지어 자신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일개 여배우에게 가장 악랄한 방식으로 누명 씌우려고 했던 처참한 인물을.
이 남성이 해야 하는 건 뼈저린 사과와 진심어린 반성 혹은 보상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아름다운 여성과의 연애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칭찬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면서 구렁텅이에 빠졌던 인생이 해결 되어가고 있다며 정신승리합니다. 이건 마치 자신에게 가혹한 성폭력을 저지른 남성과 결혼해서 트라우마를 해결(?)하려는 정신분열적 여성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그것도 사랑에 푹 빠져서. 혹시 ‘야동’에나 나올법한 스토리는 아닌가요?
정희와 유라는 극단적으로 의존성이 강한 존재들입니다. 스스로는 절대 인생을 개척할 수 없는 인물들이며, 자신의 행불행이 오로지 남성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남성 입장에서는 섬뜩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존재여야 하는데, 다른 한편에서 보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여전히 나만 바라보고 죽도록 나만 사랑하는 존재라는 거죠. 이것도 또 하나의 남성 판타지일 수 있습니다. 혹시 이 대목에서 ‘엄마’가 떠오르지는 않나요?
동훈의 아내인 윤희는 어떤가요. 남편이 자신보다 원가족을 더 챙긴다고 외도나 하는 인물입니다. 변호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남자의 사랑 없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죠. 흥미로운 점이 이 드라마에서 ‘바람피우는 유부녀’는 윤희를 포함해 3명이나 등장합니다. 지안을 괴롭히던 직장동료와 동훈의 단골식당 사장의 와이프까지. 윤희처럼 남편이 사랑을 주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님 그냥 이기적이고 사악해서였을까요. 이야기에서 배경 설명이 없는 반복적 설정은 그게 ‘기본값’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줍니다. 바람피는 여성은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가요?
이 드라마에서 여성은 헌신적인 엄마이거나, 엄마처럼 무한 사랑을 주는 인물이 아니면 모두 가해자입니다. 지안 역시 동훈에게 무한 사랑을 퍼붓는 인물이며, 여성 가해자들을 혼내주고 계몽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작가가 보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인 듯합니다. 집에 들어갈 때 남편의 ‘뭐 사가?’ 이 한마디만으로도 무한 감사를 할 줄 아는 여성. 남자가 무자비하게 폭행을 해도 이게 사랑의 표현일 수 있구나, 라는 걸 납득하는 여성.
혹시 <나의 아저씨>의 첫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팥알만 한 무당벌레 한 마리가 사무실 안으로 날아들었는데 거대한 호박벌이라며 과장되게 호들갑을 떠는 여성이 나옵니다. 이어 무표정한 얼굴로 태연하게 무당벌레를 때려잡는 지안이 등장해 강렬한 대비를 이루죠. 아마도 ‘보통의 경박한 여성’과는 지안이 아주 많이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던 장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리적으로 다 클만큼 큰 청장년의 남녀들은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다고 작가가 치부했다고 치죠. 드라마 내내 수수한 외모와 사춘기 반항아 같은 말투와 표정으로 자신이 아직 ‘아이’임을 끊임없이 드러냈던 지안의 성장은 다룰 수 있고 다루어야 했다고 봅니다. 아마도 마지막 장면에 한명의 성인 여성으로서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면 제법 잘 성장한 거 아니냐고 반문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사회가 받아들일 만한 외모와 태도의 변화도 성장일 수 있지만, 지안이 개과천선할 수 있었던 계기는 내적 성장이라기보다 동훈과 주변인들의 물리적 경제적 지원이 그 배경이라고 봐집니다.
비참하게 어두운 과거와 큰 상처가 있는 그가 반항아 이미지에서 벗어나 ‘진짜 어른’으로 거듭나려면, 그것은 살면서 로또급으로 만나기 힘든 타인의 물적 심적 지원보다는 자신의 내면에서 기인해야 한다고 봅니다. 누군가의 전폭적인 지원과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성장하는 건 전형적인 아이의 모습이며, 무슨 짓을 해도 믿고 이해하고 칭찬하는 관계가 만들어져야만 할 수 있는 성찰은 성찰이 아닙니다. 그저 기적적으로 구원자가 나타난 것일 뿐.
작가는, 주변에 늘 사람이 많고 왁자지껄해야 잘 사는 거라는 세계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인들이 남성 관계 위주로 이루어지는 걸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여성의 원가족은 완벽하게 배제되고, 남편이 승진하면 아내가 시어머니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며 축하해주는 정도로 기울어진 구조를 일반이라고 인식합니다. 여성은 완벽한 주변인이며, 남성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인 듯합니다. 박동훈의 휴대폰에 저장된 아내의 이름처럼 ‘집사람’일 뿐입니다.
현실에서 제법 익숙하게 강요되는 패턴 아닌가요. 박동훈처럼 관계 지향적으로 살라는 요구 말입니다. 정확히는 남성관계 지향적인 것이지만. 물론 우리는 남녀를 불문하고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이런 구시대적 사고와 싸우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것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때로 저항하지만 더 많은 순간에 순응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이 인생 전반에 걸쳐 있잖아요.
이 드라마가 위로가 되는 건, 그렇게 순응하고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살아온 대로 살아도 된다고. 가장 가까운 한둘의 관계가 망가질지언정 더 많은 관계 확장을 하고 그러다 보면 박동훈처럼 무한 신뢰와 인정이 따라올 거라고. 당장 불행할 수는 있지만 그게 이상적인 삶이 맞다고. 적어도 내가 옳다고 믿으며 살아온 삶을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안심하는 겁니다.
작가 박해영의 인물들은 나름 열심히 사는데 엄마 채찍질에 못 이겨 마지못해 수레를 돌리는 아이들 같습니다. 지나치게 의존적이고 그래서 처절하게 불행하고 눈치보고 갈등하고 내내 징징대고 가끔 건방지고 폭력적인데 말로만 어른인 척하는 존재.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짊어지느라 아무도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상태에 있죠. 어쩌면 시청자는 이런 캐릭터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의 위로는 내 삶을 고착화할 뿐 인생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내 삶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진리나 각성은 보통 낯설고 아픕니다. 마주하기 힘들고 회피하고 싶은 것들뿐이죠. 그저 익숙함에 위로 받고 안심하고 쳇바퀴 같은 삶을 반복하는 당신. 어쩌면 그래서 당신이 여전히 불행한지도요. 박동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