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남성들은 왜 그럴까?

청년 남성들의 보수화 혹은 생존 오류

by 인마니

너무도 쉬워진 집단화 &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 폭발


현재의 젊은 남성들이 연대 혹은 단합을 잘한다고 하면 의구심을 가질 분들이 있을 겁니다. ‘요즘 애들’ 대부분이 개인주의고 이기주의 심하다고 비난하는 게 ‘요즘 어른들’의 일상이니까요. 이런 비난은 사실 문화적 변화를 못 받아들이는 기성세대의 구태고, 오래 산 사람이 늘 옳고 우월하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오만이며, 젊은 세대를 내 방식대로 통제하려는 가스라이팅이죠. 2500년 전 사람인 소크라테스도, 4천년 전 수메르 문명의 기록도 “요즘 애들 버릇없다”고 했답니다. 앞으로 천년 뒤에도 ‘요즘 어른들’은 그러고 있을까요?


어쩌면 통제 욕구만 가득한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 강력한 또래 결집으로 이어졌을 겁니다. 단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꽤 큰 역할을 했을 거라는 거죠. 반도체 전문가인 유웅환 박사가 유튜브 채널 <압권>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합니다. 본인이 다니던 회사의 중간 매니저가 찾아와서 “요즘 애들하고 일하기 너무 힘들다. 이걸요? 제가요? 왜요? 이렇게 한다”면서 “우리 때는 다 까라면 깠고 밤새서 일했다”고 호소했다는 것. 그래서 유 박사가 질문했답니다. “혹시 그 친구한테 이 일이 당신한테 왜 적합한지,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지,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 이런 걸 다 설명을 해 주셨나요?”라고. 이때 <압권>의 진행자인 권순우 기자가 한숨을 푹 쉬면서 “그걸 다 설명을 해야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유 박사는 단호하게 “해야 됩니다!”라고 답하죠.


이 대화 안에 일말의 답이 들어있지 않나요? 기성세대가 그동안 자녀 혹은 어린 세대를 어떻게 대해왔는지가 다 보이죠. “니가 뭘 알아? 넌 아직 세상물정을 몰라!”, “넌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해.”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지금 청년 세대만 이런 대접을 받은 건 아닙니다. 수천년 전 사람들부터 불과 한 세대 앞선 엄마, 아빠, 선배들도 비슷한 취급을 받으면서 성장했을 겁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부모의 부모는 돌볼 자녀들이 많았고, 어려운 형편에 참견할 시간도 없었고, 교육수준이 낮아서 “우리가 뭘 알겠니. 니 알아서 잘 하겠지.”가 흔한 대화였고, 선택권을 자녀에게 주는 일도 많았죠. 어쩌면 그래서 상대적으로 공공에 분노를 터뜨리는 일이 적었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한 분노는 보통 안으로 흐르지, 밖으로 흐르지는 않으니까요.


사실 더 강력한 차이점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인터넷. 유튜브와 SNS, 여론 형성이 쉬운 포털과 대형화된 온라인 커뮤니티의 등장은 대중의 이념과 사상을 통합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합니다. 젊은 시절 기껏해야 PC통신으로 채팅을 하거나 미니홈피를 꾸며 각자의 개성을 어필했던 부모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 펼쳐진 거죠. 가뜩이나 “남들처럼”, “평균 이상만”을 외치는 보수집단주의 성향의 한국인들에게 비교와 획일화는 일종의 생존 문제고, 집단화가 비대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집단이 커질수록 당연하게도 더 독하고 과장된 폭력을 양산하게 되죠.


그런데 왜 유독 남성일까?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겠죠. 남성은 원초적으로 경쟁, 리더십, 집단활동이 더 강조된 측면이 있고, 남성 호르몬의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건 뿌리는 다 하나로 통하는 듯합니다. 남성성에 대한 위협. 진화론적으로도 번식에 대한 집착은 남성이 훨씬 강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부양도, 내집 마련도 다 글러먹게 생긴 거죠. 원래 집단화와 폭력은 불안을 먹고 자랍니다.



남성성 상실에 대한 불안 &

성중독과 수치심, 낙인에 대한 공포


2005년 코넬대학 연구에 따르면 남성들은 자신의 남성성이 위협 받는다고 느낄 때 더 적대적이고 과장된 마초 성향을 드러냅니다. 당시 실험 참가자들 중 한 남성그룹에 “여성적 경향이 강하다”는 가짜 피드백을 주자, 전쟁을 지지하고, 동성애에 더 부정적이고, SUV같은 큰 차에 대한 선호가 더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치심과 불안, 좌절과 죄책감을 더 겪은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반면, 여성 참가자들은 같은 연구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는 지표는 문화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가장의 역할이 있죠. 그런데 한국은 일종의 섹스중심사회로, 가장이 되기 전부터 이미 성경험의 횟수에 따라 남성성의 우위가 결정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청년 남성에게는 많은 성관계를 하라고 정서적으로 강제하고, 반면 여성에게는 성 경험이 없기를 요구하죠. 교미의 빈도에 집착하는 수컷 동물사회와 도덕적 통제를 하려는 인간사회가 혼재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여성과 남성에 서로 다른 성적 요구, 한편에선 성을 억압하고 다른 쪽에선 성을 과잉 소비하는 문화적 이중 메시지는 청년 개인에게 정체성 혼란과 죄책감, 자의식 과잉과 수치심을 동시에 초래합니다. 그래서 잔뜩 화가 나 있는 것 같습니다. 길바닥에 여자가 저렇게 많은데 왜 내가 잘 여자는 이 정도로 없냐는 거죠. 날 무시해서 내 ‘정당한 권리’조차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정말 많은 남성들이 ‘성 중독’에 빠져있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존 브래드쇼는 중독의 원인이 ‘수치심’이라고 했고, 전 우리 사회에서 알코올 중독보다 심각한 문제가 성중독이라고 봅니다. 최광현 교수는 <가족의 두 얼굴>에서 성중독에 대해 단순히 이성이나 섹스를 좋아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섹스에 대해 생각하고, 매일처럼 이어가는 성적 공상과 포르노, 자위행위를 통해 긴장과 스트레스를 전환시키며, 심지어 가공의 상대를 만들어낸다고도 했습니다. 성에 대한 탐닉은 안타깝게도 ‘친밀감의 결여’에서 생기고, 부모나 주변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자기 몸을 만지는 것이 유일한 스킨십일 거라는 겁니다.


우리 사회의 청년 남성들이 정말 이 정도로 여자 만날 일이 없을까요? 여성에게 성경험이 없기를 요구하면 본인들은 대체 누구랑 자나요? 남자끼리 자나요? 이런 모순적인 메시지도 문제지만, 이건 어쩌면 그들 자신이 초래한 악순환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청년 남성들은 남성성을 회복하기 위해 대규모로 결집하지만, 인간 여성은 집단화된 남성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며 심지어 혐오와 공포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들은 흑화한 페미니스트를 공격한다고 하지만 페미의 기준을 자의적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페미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집단 남성을 멀리 합니다. 심지어 남성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여성을 기피합니다. 외모가 별로면 성적 매력을 못 느끼고, 보통 얼굴이면 헤픈 여자일지 모른다고 경계하고, 예쁜 여자면 꽃뱀이라고 의심하죠. 성폭력 낙인과 무고에 대한 과잉된 공포 역시 여성을 멀리 하게 합니다. 성경험이 많은 여성을 악마화하는 것도 어쩌면 성중독에 빠진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생존형 선택일 겁니다. 살면서 만나는 여성 대다수를 성적 매력으로 점수화하고, 자고 싶은 여자와 아닌 여자로 구분하며 대상화하지만, 여성 자신이 그걸 원한다거나 스스로 자초했다고 믿고 싶어 하죠. 성매매 여성 역시 돈에 미쳐서 ‘쉬운’ 돈벌이를 하는 악녀여야 합니다. 그래야 성매수를 하는 자신이 궁지에 몰린 여성을 이용하는 게 아닌 게 되니까요.


김누리 교수는 <당신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에서 “성에 대한 죄책감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의 억압과 도덕주의가 내 안에 버젓이 살아있는 본능을 ‘악’이라고 공격하면, 본능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자아가 점점 더 강한 죄의식을 내면화한다고요. 그럴수록 약한 자아를 갖게 되고, 권력에 굴종하는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더구나 한국의 교육방식은 야단치고, 벌주고, 비교하고, 창의적 생각을 조롱하는 식으로 약한 자아를 만드는 데 더 특화돼있다는 것이죠. 독일의 교육은 ‘성과 관련해서 절대 윤리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이 있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소비에 대한 죄책감을 느낄지언정 성적 죄책감을 갖지는 않는다고 하네요. 어쩌면 이 부분이 우리 사회의 청년 남성들이 기득권이 아닌 여성이나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분노는 항상 아래로 흐른다고 하잖아요. 침팬지 사회처럼.



엄마와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 &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가장의 역할에 대한 상실 공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청년 남성들은 좋은 여자 혹은 예쁜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가장의 책임을 아주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여기에 부모 봉양까지 더합니다. 여성이나 사회가 짐 지우는 것도 있겠지만, 일단 배우자를 만나기 전이라면 그게 스스로 규정하는 무게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잡은 기준점은 흔히 아버지가 되곤 합니다. 아들은 보통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때 가장 큰 만족감을 갖는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은 사회적 성취동기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저성장 시대에 양질의 일자리 부족 사태를 겪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청년들에겐 아주 최고난이도의 숙제일 겁니다. 그나마 아버지가 아들에게 져주고, 공감해주고, 인정해주는 진심을 보인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일 테지만 우리 사회의 아버지들이 어디 그런가요? 아들은 권위적이고 무관심한 아버지의 인정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고 자각하는 순간, 애타는 조바심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변하기도 한다고 최광현 교수는 설명합니다. 자녀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를 공격하는 방식은 대개 수동적이고 자학적인데, 보통 무기력해지고, 할 일을 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의욕과 흥미를 잃어버리는 식이라고 하죠. 근데 어머니와 편을 짜서 아버지를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의 아들들은 대체로 어머니와 아주 끈끈합니다. 군대에 입대한 20대 청년이 어머니라는 말에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만큼 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게 꼭 잘못된 것은 아니고, 우리 청년들이 마마보이여서도 아닙니다. 그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감정 통제를 강요당하면서 살아왔고,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감정 표현이 ‘엄마’에 대한 것이니, 그동안 억압됐던 감정들이 엄마라는 분출구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항해 함께 싸우거나, 함께 몸을 움츠리고 서로를 위로해줘야 했던 동지애가 작용했을 수도 있죠. 아들의 나이가 아주 어렸을 때였다면 폭압적인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엄마를 통해 그나마 누그러뜨렸을 테니 그만큼 더 의지하고 밀착하는 관계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밀착관계가 성인이 된 후나 심지어 결혼 후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꽤 있죠. 그저 습관일 수도 있고, 위안의 연장일 수도 있는데, 아무리 효도로 치환하려고 해도 마마보이로 보일 수 있는 여지를 이 남성들은 은연중에 고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편에선 남성성 강화에 더 집착하게 되는 거죠.


이건 어머니를 성녀화 하는 현상으로도 이어집니다. 내가 엄마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존경과 보상을 보내는 거다, 라는 암시를 주고 싶은 거죠. 이런 현상은 아들이 여성을 보는 기준점을 자신의 어머니로 잡게 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엄마가 아니라 성녀화된 엄마죠. 자신의 기억에 없는 출생 전의 엄마나, 자식에게 폭언을 퍼붓던 나쁜 엄마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삭제되고, 아버지의 폭압에도 끝내 가정을 지키고 자식들을 열심히 키워낸 불굴의 여성으로만 남는 겁니다. 결혼을 한 아들이 원래 잘 하지 않던 집안일을 하면서 나 정도면 괜찮은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 기준이 자신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집안일은 손도 대지 않았던 내 아버지에 비하면 난 엄청 많이 하는 거고, 집안의 온갖 대소사에 몸이 남아나질 않았던 내 어머니에 비하면 내 아내는 엄청 편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게 되는 겁니다. 아들의 여성상은 그렇게 완성되며, 내 아내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과한 욕심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을 잘못 받아서라는 혐오적 시선 &

‘답정너’인데 스스로 선택했다는 착각


정치 현안에 대한 문제도 빠질 수 없죠. 4050으로 추정되는 혹자들은 2030 남성들이 박근혜와 이명박 정권일 때 교육을 받아서 보수화 혹은 극우화 됐다고 말합니다. 일말의 진실이 있나요?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이명박 정부에서 국정원과 군대, 민간을 동원해 민주당 혐오와 정치 혐오를 조장하는 여론 공작을 대대적으로 펼쳤으니 인터넷 커뮤니티에 특화돼있는 청년 남성들에게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이런 지적을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북한식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 할 자격이 있을까요? 학교에서 반공교육과 군사 훈련을 받고,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저녁 6시면 발걸음을 멈추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태극기를 향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사람들이? 더구나 그런 논리는 같은 교육을 받은 2030 여성들이 진보화 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일말의 설명도 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보수화 경향에 대해 질문하는 언론들에게 몇몇 청년 남성들이 이런 답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자신은 원래 민주당 혹은 진보 성향이었는데, 많은 자료를 찾아본 끝에 ‘진실’을 알게 됐고, 보수를 지지하게 됐다고. 그런데 그들이 각성했다는 ‘진실’은 여전히 논란이 많은 것들이었고, 그들의 말은 스스로 통찰했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닌, 보수 커뮤니티나 SNS에서 복사 붙여넣기 수준으로 주장하는 것들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옮겨 발음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들은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자료를 찾아보는 동안 그들이 믿는 것과 반대되는 정보에도 분명히 노출이 되었을 겁니다. 결국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둘 혹은 여럿의 정보 중에 보수나 극우에 치우친 쪽을 자신이 취사선택한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없어서 굳이 애써 그것이 ‘진리’라고 단정하는 종교인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청년 남성이 보수를 취사선택했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게 자신에게 이익을 준다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그게 선동이든 진실이든, 아무래도 또래 집단이 강조하고 반복적으로 제공한 정보를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집단적 결속, 소속감 그리고 남성성을 강화한다고 느꼈을 겁니다. 무엇보다 기분 나쁨의 문제를 후련함으로 치환해주거든요. 일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을 지라도. 원래 불행할수록 보수적인 선택을 합니다. 불행하면 복잡한 사고가 어렵고 위험을 회피하는 쪽으로 단순한 사고를 하려고 하죠. 단순한 사고일수록 유전자 체제에 충실한 동물적 선택일 확률이 높습니다. 불행은 생존을 위협하고, 유전자가 생존에 유리하다고 인식하는 원초적 선택을 하는 것이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온갖 핑계를 대서 기피하고 거부하는 식으로요. 주로 수렵채집 사회에서 통하던 본능이긴 하죠. 그렇다고 2030 여성이 불행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성은 번식과 생존의 문제를 여성성과 연결하지 않고, 그래서 그나마 다양한 선택권이 있었을 테니까요. 반면 남성성과 안티페미니즘으로 똘똘 뭉쳐있던 남성에게는 상대적으로 선택권이 많지 않았을 겁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문화적 정서적 선택권을 말합니다. 여성들이 똑똑해서 다양한 선택을 한 게 아니라, 남성에 비해 번식 강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유전자로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겁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혜신 박사는 <당신이 옳다>에서 이런 내용을 적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의 시위를 훼방 놓기 위해 모인 태극기 집회에서 한 노인 남성을 만났는데, 공격적이고 전투력 빵빵하던 그 분이 그분의 삶과 일상에 대해 가만히 들어주고 공감해주자 갑자기 자기반성을 하더라는 겁니다. 애들 엄마한테 자기가 너무 심했다면서. 그 노인 남성은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치환해줄 어떤 통로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정치가 그걸 이용했던 것이고요. 청년 남성들 역시 공감과 포용, 따뜻하게 안아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팩트와 논리로는 절대 그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이 믿고 있는 정보가 일부 사실일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1% 사실인 논리와 30% 혹은 60% 사실인 논리가 엄연히 구분이 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는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사실만 포함되면 취사선택이 쉽고, 믿음을 신앙처럼 유지하는 게 가능해지니까요.


와인에 ‘레스베라트롤’이라는 암 세포 증식을 억제하는 항산화 물질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와인을 많이 마시면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성분이 와인에 얼마나 들었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사실 와인에 함유된 레스베라트롤은 약용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극미량이고, 누군가는 와인으로 암 예방을 하려면 하루에 7백잔을 마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청년 남성들이 암이 사라질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매일 7백잔의 와인을 마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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