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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den Jul 11. 2020

실패를 인정하는 것에 대하여

빛 좋은 개살구의 일기

"얘들아, 엄마가 성공한 것 같니, 아님 실패한 것 같니?"

"응? 왜?"

만으로 일곱 살인 둘째 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본다. 그러다 이내 그 얼마 되지 않는 집중력이 다한 듯 딴 얘기를 한다. 그래, 나의 실패는 적어도 내 딸에겐 별 것 아닌 주제구나. 일곱 살 난 딸에게 그런 심오한 질문을 던진 나 자신을 뿌듯해하며 억지스럽게 긍정적인 결론을 내 본다. 하긴 마흔 줄인 나조차도 우리 엄마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그냥 엄마는 내 엄마이지. 실패나 성공의 개념을 그녀에게 적용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갑자기 나의 실패와 패배를 지독하게 묵상하곤 했던 수많은 밤들이 아까워진다. 페이스북을 본 날은 유독 그랬다. 그렇게 나 자신을 옥 조이며 힘들게 하지 말고 그놈의 페이스북 볼 시간에 차라리 손가락 끝으로 머리통 정수리나 몇 번 더 두드렸더라면 휑한 내 머리숱에 한 두 줄기나마 더 보탤 수 있었을 텐데. 


 볼품없는 내 머리숱보다 더욱 슬픈 이야기가 있다. 그건 바로 내가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이다. 20여 년 전 13개의 원서를 뿌린 중 딱 한 군데에서 장학금, 생활비 포함 대학원 합격 메일을 받고 부모님 앞에서 훌라춤을 출 때만 해도 그것이 어떤 미래로 이어질 지 몰랐다. 혹시나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 길을 다시 택할 것을 직감적으로 아는 나는, 운명적 개살구임에 틀림없다. 


 나는 ‘해박’, 소위들 말하는 해외 박사다. 갑자기 재수의 부재를 느끼며 뒤로 가기를 누르려는 이들이 있겠지만 이건 사실 누구에게도 들키기 죽기보다 싫은 나의 패배감과 불안함을 감추기에 딱 좋은 간판일 뿐이다. 두 아이 출산과 조부모 찬스 없이 미국에서 공부하며 한 육아, 금전적 쪼들림의 압박, 어려운 박사 자격시험들의 고배와 재도전 등의 역경 드라마는 내 여기 앉은자리에서 3박 4일 동안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고귀한 간판을 향한 험난한 여정을 내세우며 조금 전 뒤로 가려던 이들의 가슴속에 있는 측은지심을 끌어내려는 것은 아니다. 결국 졸업은 했으니 그 고행길 자체의 결과는 실패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억울하게도(?) 고행길이 지나니 나의 본격적인 마음고생이 시작되었다.


 어찌 저찌 박사가 되긴 했지만 이렇다 할 논문도 없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세련된 기술도 하나 없이 졸업을 했다. 세상 앞에 벌거벗겨진 채 내 놓인 모지리가 된 기분이었다. 함께 아이를 돌보며 공부하느라 아직 학업을 마치지 못 한 남편과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교수 자리 지원은 몇 개 안 했다. 실적 없는 내가 갈 수 있는 학교는 없었고 다행히 집 근처에 있던, 전공과 조금 관련된 소프트웨어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무려 미국 회사에 취직했으니 모지리는 면했다며 이번엔 남편 앞에서 훌라춤을 추고 기뻐했던 나는, 회사에 다닌 지 1년 정도가 지나자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좌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사회는 참으로 학교와는 다르다. 자비 없는 어른 세계에서의 영어는 잘 안 들리기 일쑤였고, 내가 말하면 표정이 이상해지는 몇몇 동료들에게 모른 척 웃음을 날려야 하는 일들이 생기곤 했다. 하지만 진짜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이런 외부의 요소가 아니었다. 복병은 내 안에 있었다.  전공과 관련 없는 무의미한 반복적인 일들을 해야 할 때마다 내가 이러려고 6년간 박사 공부를 했나 싶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졸업했지만 학문적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친구들과 동료들의 소식을 들은 날이면 내 안의 실망을 정성스럽고 날카롭게 갈아 나 자신에게 찔러대던 날들이 많아졌다. 그렇다. 화려한 나의 박사라는 타이틀은 오히려 나를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였다. 그 어떤 것을 해도 아카데미아 즉 학계가 아니면 겁쟁이처럼 도주하는 루저로 치부하게 만들어 버리는 지독한 걸림돌, 주홍글씨가 되어 나를 공격했다. 성공의 탈을 쓴 실패의 흉악한 실체가 내 속의 간사한 자만심과 허영심을 앞장 세워 나를 장악해 갔다. 남 모르는 패배감을 가슴속 깊이 품은 채로, 여느 직장인들처럼 위아래로 널뛰기를 해대는 피로감을 부여잡으며 3년 정도 회사를 다니던 중 들려온 남편의 한국 직장 합격소식은 소중한 한 줄기 빛이었다.


 직장을 뒤로하고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왔다. 우리 가족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친척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미국 회사에서 느껴 온 좌절감에서 해방된 그 개운함, 그 편안함이 6개월 정도는 유지된 것 같다. 내 고향의 약발이 떨어지자 내 안에 기생하던 끈질긴 족쇄의 감정들이 스멀스멀 다시 기어 나와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허울뿐인 박사 타이틀이었지만 그래도 그 밑천으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자괴감과 쪽팔림의 콤보로 나를 공격해왔다. 한국에서 기회가 생겼던 6개월의 짧은 연구원 생활, 2년 동안의 집 근처 대학 강사 생활은 하늘처럼 높은 나의 자존심에 부응하지 못했다. 학문적으로 뭔가 기여해야 할 것 같은 정의감의 탈을 쓴 허영심이 불타 오르던 나에게 다시 한번 연구직의 기회가 왔다. 전공과는 조금 다른 분야였지만 무언가를 새롭게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자체로 나의 목마름을 어느 정도 채워주는 듯했고 아카데미아에서의 경력 단절 아줌마였던 나는 그 시간들을 감사하며 즐기던 중이었다. 


 “우리, 다시 한국을 떠날까.” 

초등학생인 두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도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공부하며 일하며 지냈던 10년 정도의 미국 생활은 우리 부부의 생활 패턴과 가치관을 새로 형성하기에 충분했고, 그것은 한국에서 대기업을 다니는 남편과 워킹맘인 나의 삶에서 충족되지 못했다. 그렇게 남편의 이직으로 다시 한국을 떠나며 나는 이렇다 할 성과 없는 2년간의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북유럽의 스웨덴에 와 있다. 아이들 학교며 남편의 새로운 직장에 적응을 좀 한 다음 나의 커리어를 다시 시작해 볼 참이었다. 스웨덴에 온 지 6개월쯤 됐을 때, 이제 경력 단절에서 슬슬 벗어나 볼까 했던 나는 운명처럼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를 마주하게 된다. 이전에 있던 나의 좌절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이제 전 세계인들의 공통적인 이슈가 되었고 나는 간사하게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 거대한 물살에 몸을 맡겼다. 모두들 힘들어하는 거대한 물살의 힘인지, 평화로운 이 곳의 자연의 힘인지 아니면 생사의 기로에 비해 너무 작아진 입신양명이 차지하는 비중 탓일까. 이유야 무엇이건 나는 꽤 갑작스럽게, 그리고 의외로 담담하게 나의 학문적 실패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이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다.


 이제 나는 내 미래 직업에 대한 고집을 버리고 나의 행동반경을 제한하지 않기로 했다. 요즘도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고 있고 가끔 인터뷰도 하지만 아직 나는 아카데미아에서도, 기업에서도 선택받지 못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여기저기 떨어져도 아직 내 마음이 편하다. 조급하지가 않다. 아카데미아에 미련이 남아있을 때보다, 박사 타이틀에 구색이 맞는 곳만 찾을 때보다 마음이 괴롭지가 않다.  생각해보니, 이전에는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종이에 맞춰서 그림을 완성시키려 애쓰느라 힘들었다면, 이제는 새하얀 도화지를 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마음이 편안한 것이 당연하다. 이참에 사업이나 구상해봐? 아님 영화 보며 울던 내 소녀감성을 소환해서 예술계 쪽으로 한번 기웃거려볼까? 호기를 부려보며 즐거운 상상을 해 보기도 하니, 사실 가정 외 소속이 없을 뿐이지 행복한 요즘이다. 나는 말랑말랑 유연해지고 있고 내 영역은 확장되고 있다. 


 말랑해지니 나 자신에게 혹독하던 비판도 작아졌다.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서 성과를 냈어야 했는데.. 그때 이걸 좀 해 둘 걸.. 하는 그런 후회들도 적어진다. 내 생각을 지배하던 후회를 놓을수록, 나를 붙잡는 게 질척이는 과거가 아니라 내가 과거를 지독히도 움켜쥐고 있었구나 싶다. 몸뚱이는 미국, 유럽 등 세계로 뻗어가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조그마한 우물 속으로 점점 들어가 갇혔던 시간들이었다. 창피해서 일기장에도 쓰지 않았던 이런 마음속 이야기들을 아프지만 그래도 담담하게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써 내려갈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만큼 유연해졌다는 하나의 증거로 볼 수도 있겠다. 물론 하루아침에 내가 갑자기 나은 사람으로 될 리는 만무하다. 내일 아침이면 후회할 수도 있겠지. 아 이 망신살을 수습할 수 있을까.. 하며 저 족쇄 같은 녀석이 내 용기를 다시 주워 담으려 할 것이다.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 조금씩 엎지르면 언젠가는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지금 나는 또 다른 실패할 영역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렵지 않다는 건 거짓말일 테고 지금까지의 좌절감과 실패가 있기에 나는 조금은 덜 두렵다. 과거의 실패를 인정하는 나는 충분히 멋지고, 시간은 언제나 성실하고 정직하게 나와 함께 하니 충분히 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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