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 애기 엄마들 그리고 나의 변명
한국에 온 후 우리 집에서 사회생활을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여섯 살 큰 아이였다. 귀국 후 비행기 여독이 풀린 지 며칠도 안 되어 유치원에 등원하게 된 것. 계절에 맞는 여벌의 옷이며, 실내화며, 급식판 등 아이의 유치원 생활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오랜만에 맞춰놓은 알람 시계 덕에 시작한 바쁜 아침. 부랴부랴 시리얼이라도 챙겨 먹이고 유치원 노랑 버스를 태우러 아이손을 잡고 아파트 정문 앞에 허겁지겁 나온 나는 순간 방금 먹은 시리얼 박스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아, 나는 너무(?) 무방비상태로 나왔구나. 미 중부 시골에서 온 나는 청바지에 허름한 카우보이 부츠를 신는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그저 질기니까 입고 편하니까 신었을 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정갈하게 단화를 신고 깔끔한 구김 없는 옷을 꾸민 듯 안 꾸민 듯 입고 그보다 더 예쁘게 꾸민 아이 손을 잡고 있는 아이 엄마들을 보고 충격과 창피함이 동시에 왔다. 상쾌하지만 차분한 색감과 딱 붙지 않고 하늘하늘한 실루엣. 어쩜 저리 엄청난 센스를 가졌을까 감격하기에는 나 말고 모든 엄마들이 다 그런 상태다. 얼른 유치원 노랑 버스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허벅지와 엉덩이가 하얗게 빛바랜 내 청바지가, 흙먼지와 긁힌 자국이 선명한 내 카우보이 부츠가 부끄러웠다.
그 후 오랜만에 대학 동창들과 모여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온 꼬질꼬질한 나를 향해 거침없이 애정을 담아 조언해주는 또 다른 무리의 때깔 좋은 그녀들. "그래 속눈썹 문신이라고 하니 더 낫다. 계속 그렇게 노력하는 거야." "나도 전에 미국 일 년 갔다 왔을 때 공항에서 엄마가 눈시울을 붉히더라. 미국 거지 왔다고. 호호호"
다시 유치원 친구 엄마들로 돌아오자. 아파트 단지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요가나 에어로빅 수업을 하며 군살 없이 단단한 몸매를 가진 그녀들은 과시하듯 몸매를 드러내려 딱 붙는 옷을 입지도 않는다. 적당히 여유롭게 하늘하늘거리며 색감과 소재를 적절히 활용해 최상의 실루엣을 만들어낸다. 정녕 세련되었다. 깔끔하지만 포인트를 주어 지루하지 않은 손톱 꾸밈, 수수한 듯 수수하지 않은 옷차림에 명품가방 하나 매치하여 품격 있어 보이는 그 몸가짐.
안 되겠다.
신발이며 옷이며 이리저리 주워들은 풍문과 눈치로 사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 뭔가 나는 촌스럽다. 무엇이 문제일까. 아직 미미한 수준이지만 전보다 업그레이드된 나의 패션 레이더망에 내 푸석푸석한 까만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외로울까 봐 함께 푸석푸석한 피부결은 덤이다. 동네 엄마들의 자연스러운 염색머리와 컬을 나는 미처 캐치하지 못했던 것. 까놓은 삶은 달걀처럼 반들반들한 그녀들의 살결도 나는 별생각 없이 넘겼던 것이다. 나중에 듣기로는 머릿결과 피부, 그리고 몸매야 말로 스타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마치 기초수업 101도 듣지 않고 실력자들의 작품만 보고 수박 겉핡기 식으로 따라한 것을 들킨 듯 부끄러웠다. 고수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그런지 역시나 동네에는 한 블록당 한 두 개씩의 미용실과 피부과들이 즐비해 있었다. (한국에 와서 나는 왜 치킨집과 찹쌀 꽈배기 집들만 눈에 보였는지.) 몇 달간 미용실과 피부과를 들락날락하니 나도 조금씩 그녀들에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음.. 자고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 했다. 꾸밈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몸소 체험했다. 센스도 중요하고 돈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상태를 유지하는 관리 능력, 성실함과 부지런함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계절마다 바뀌는 트렌드를 따라가는 민첩한 감각과 예리함도 갖춰야 가능한 것이었다.
나의 게으름 탓도 크지만 사실 그게 또 다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 내공은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랜 시간 한국의 트렌드와 미적 감각으로 훈련(?)되어 온 그녀들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발끝에도 미칠 수 없는 그 어떠한 레벨이 있다. 한계를 느끼며 나는 지쳐가기 시작했고 꾸미기 초보와 고수 사이(이지만 초보에 가까운) 그 어딘가의 상태로 수렴해 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