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했던 엄마
직업군인이던 아빠가 예정보다 조금 이른 전역 후에 시작하신 사업이 사기를 당해 쫄딱 망했을 때,
그래서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나와 후미진 골목의 허름한 주택으로 이사를 해야 했을 때,
엄마는 아빠에게 어떤 추궁과 비난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우선 좀 쉬라고, 그 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위로할 뿐이었다.
그 때 참 고마웠다고, 아빠는 종종 말씀하신다.
평생을 군인장교의 아내로, 주부로 살아왔던 엄마는
지쳐있는 아빠에게 의지하는 대신,
참 용감하게도,
은행에 가서 생활비를 포함한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엄마 나이 마흔 여덣 즈음이었다.
그렇게 심리 상담 공부를 시작하고, 몇년이 지난 후 엄마는 심리 상담가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엄마의 상담 경험들은 쌓여갔고, 50 후반, 60대에는 수많은 임상을 가진, 실력있는 상담가로 정부의 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에도 등록된 꽤나 잘 나가는 상담가로 활동했다.
엄마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고 했다.
아직 어린 대여섯살 짜리가 아버지를 잃었을 때, 그로부터 한참 후 어머니를 잃을 뻔 했을 때가 그 원인일 거라고 하셨다.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대형참사가 일어났을 때에는 불안감에 지하주차장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어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결국 정면으로 나서 행동했고,
다시 용감하게도,
공포를 극복하는 첫 발을 떼어, '죽음준비'를 하셨다.
상담활동을 하시며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죽음을 공부하고, 준비하는 모임을 하셨고, 여러 이들의 임종을 돕기도 하셨다.
종종 나에게도, 사람은 잘 죽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준비해 온 덕일까.
막상 자신에게 갑작스러운 죽음이 닥쳤을 때, 살 날이 며칠 안 남았다는 비보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엄마의 태도는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표정은 담담했고 태도는 평온했다.
평소 엄마에게 죽음준비 공부나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던 아빠는 엄마의 뜻에 따라 임종면회를 준비하셨다. 지인들이 엄마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게끔 의사선생님이 외부인 면회를 가능하게 배려해주셨고, 아빠는 엄마의 가족,친구,가까운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하며 만남의 스케줄을 잡으셨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인사를 할 수 있어 다행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라니 슬픈 것이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눈물을 꾹 참고 한두마디 건네며 애꿎게 부은 엄마의 발을 주무르는 이들..
차마 한마디도 못하고 주사바늘 꽂힌 엄마의 손을 어루만지는 이들..
불쌍해서 어쩌냐며 통곡을 하다가 결국 아빠에게 제지당한 이들..
임종면회를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엄마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극심한 고통속에서도 끝끝내 웃음으로 인사했다.
진짜..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끝까지 참 용감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