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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첼로

by 당구와 인간

동네에 또 다른 *대대(大臺) 전용구장이 생겨났다. 모든 비품이 새것이라 콧속을 뚫고 들어오는 공기도 설악산의 단풍 향내 같다. 초크 가루를 거스른 쾌청함으로 새 ’ 나사 지 ‘(천)에 살포시 손을 내밀고 타격자세를 취해본다. 귓가에 멜로디가 나지막이 들려오자 ’ 똥손 ' 도 기분 좋은지 큐를 가뿐하게 쥔다.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며 여의봉을 잡을 때도 이런 기분이지 싶다. 편안한 마음으로 볼을 굴려보니 당구공도 리듬 타며 논다.


당구장마다 공 구름 현상이 다르듯 음악의 장르 또한 제각각이다. 오픈한 대대 구장을 둘러보면 주로 클래식이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시설도 예전 같지 않아 우아한 분위기에 중후함을 돋우려는 것 같았다. 이런 환경이 쭉 이어지면 좋으련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님맞이가 느슨해지는 경우가 잦다. 음악 소리가 서서히 사그라짐과 동시에 TV가 그 공간을 차지해 버린다. 해묵은 당구장은 오로지 당구공 소리로 박자를 더하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당구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왜 당구 음악이 없을까, 예전부터 품고 있던 질문은 아직까지 답을 못 찾고 있다. 모차르트가 당구광이라면서 “마술피리”를 작곡할 당시에도 당구 치다가 흥얼거리며 영감을 얻었다고 하던데. 강점기 시절 홍난파도 하루의 피로를 씻을 만큼 당구를 좋아했다던데. 오래전 함께 당구를 즐겼던 성악교수한테 운을 띄워본 적이 있었다. ‘당구 음악 한번 만들어보라고.’ 이내 호응하더니 한편으로는 갸우뚱거리던 여운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당구는 과연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오징어’ 하면 ‘땅콩’이 생각나듯 궁합이 딱 떨어지는 장르의 음률이 없을까. 궁합은 음과 양의 조화로움이다. 당구는 치는 것 즉 양의 기운이기에 음의 기운을 만났을 때 최적의 환경이 조성된다. 노랫말이 있거나 타악기는 자격이 없다. 입소리와 치는 것은 양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관악기도 제외해 본다. (피아노는 중성으로 분류하자) 남은 것은 현악기다. 현악기 중 활을 사용하지 않는 악기는 손가락으로 튕기는 단음이기에 이 또한 제외시켜 버린다. 그러고 보니 당구공 소리도 한 음이다.


활을 켜는 현악기는 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가 대표적이다. 활의 밀고 당기는 기교는 장음을 불러온다. 이는 곧 양기의 당구공 소리를 음의 기운으로 포용하는 효과를 낳는다. 궁합이 환상적이다. 유도된 노랫말도 없으니 집중력에도 도움 된다. 그중 첼로가 좋다. 묘한 느낌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세련된 중후함이라고나 할까, 첼로가 나보고 그렇게 살라고 일러주기까지 한다. 이런 내 맘 알아주는 당구장이 있으면 좋으련만.


언제부터인가 당구장 가는 길에 준비물을 챙기는 습관이 들었다. 큐가방을 열어젖히고 큐를 체결한 후 헤드폰을 머리에 걸침과 동시에 경기에 임한다. 타석에 앉아 따뜻한 녹차 한 모금을 적시며 ‘지구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맘속 외쳐본다. 귓가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선율 속으로 내 몸을 던져버리는 일만 남았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볼 일 없어 좋다. 말 섞을 일도 줄어드니 그냥 당구에 몰입하면 그만이다.


곡 하나하나에 작곡가의 숨은 사연이 있겠지만 내 것으로 사유해 버리면 그만이다. 사유로 창조된 동물적 감각으로 **‘메타(Meta) 득점’을 향해 돌진하는 일만 남았다. 경기 도중 심금 울리는 선율에 내 몸이 올라탄다면 그 경기는 당구왕 ***“날제비“도 말리지 못한다. 어떠한 난구도 다 풀어헤쳐 버리니 상대 선수가 기절초풍하면서 플루크라 한다. 의도한 대로 쳤다 해도 믿어주질 않는다. 매일같이 이런 기분이면 얼마나 좋을까.




* 스리쿠션 당구대(가로세로 1422mm x 2844mm)를 설치한 당구장.

** 무의식 상황에서 당구에만 집중하여 득점.

*** 20세기가 끝날 무렵 만화방에 당구 만화가 한때 유행했다. 대표적으로 만화가 ‘ 고행석 ‘ ’ 김철호 ‘ ’ 허영만 ‘ 이 세 분의 작품을 손꼽을 수 있으며 날제비는 김철호 만화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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