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대가리 박기

by 당구와 인간

당구장에 고등학생들이 나타나면 내심 반긴다. 아이들의 푸릇함이 좋아서다. 모르는 은어가 튀어나올 때면 놓칠세라 귀를 쫑긋거리기도 한다. 랩을 흥얼거릴 때면 잘 치려고 주문을 외우는지 빨리 읽기 시합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래도 좋다. 덩달아 내 마음도 젊어지는 것 같다. 급변하는 세상만큼이나 아이들의 유행도 하루가 멀게 변하는 것을 느낀다. 반가운 마음은 뒤처진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중대 구장에서 일이다. 엎드려 조준하는 순간 뒤에서 ‘쿵’ 소리와 함께 웃음보가 터진다. 풀어진 집중력에 몸을 일으켜 보니 한 학생이 당구대에 머리를 박는다. 옆에 있던 친구가 타격 자세를 취하더니 당구공을 빈 쿠션으로 한 바퀴 돌려버린다. 정확하게 머리를 맞춰내자 제법 큰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프지도 않은지 서로 얼굴 쳐다보며 웃음 짓기 바쁘다. 만지작거리면서 혹이 났는지 확인까지 한다. 괜찮다며 또 엎드리라고 하네. 벌칙이 한 번 더 남은 모양이다. 장난 같기도 하고 달리 보니 진지한 모습이다.


삼삼오오 모여(용돈을 쪼개어서~) 당구 놀이를 즐기는 학생들은 딱 기본요금만큼만 친다. 컵라면 먹을 돈을 아껴서 쌈짓돈을 모은 후 야박하기 그지없는 30분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이때가 중, 고1 무렵이다. 빠져들어 좀 더 치고 싶은 욕심은 *주인과의 밀당으로 합의를 보게 된다. 큐 한 자루로 돌려가면서 마무리 짓자 승자와 패자가 가려졌다. 패자는 두말없이 당구대 구석에 머리를 박으며 가슴 조아렸던 것이다.


한날 또래 학생들의 모습이 아주 진지하다. 머리 박기가 궁금해졌다. 경기가 끝나자 예상했던 다음 장면을 기다렸지만 녀석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서로의 인상마저 이상야릇해진다. 승자는 교묘한 미소를 머금고 패자는 주머니를 곰지락거린다. 머리 박기 안 하냐고 물으니 그런 건 애들이 하는 짓이라 한다. 몇 학년이냐고 물으니 고2라고 한다. 아뿔싸 1학년 때는 머리 박기를 하고 2학년부터는 게임 비용 내기 당구를 쳤던 것이었다.


이렇게 황당하기 짝이없는 청소년의 당구문화는 어른들의 작품이다. 체육시설로 승격되자 미성년들의 출입이 허용됨으로써 구축된 부끄러움이다. 공인들은 명색이 스포츠로 거듭 재탄생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사회가 바라본 당구 세상은 달랐다. 그들만의 스포츠로 자축하는 분위기 그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권마다 당구장만 늘어나 학생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것 외엔 별다른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더 암울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쿵’ 소리가 전국으로 울려 퍼졌으니 말이다.


학생들에게 당구장은 새로운 놀이터였다. 담배를 갓 배웠는지 뻐끔거리고 있다. 큐 대로 칼싸움 놀이하며 도시락이나 까먹는 장소였대도 과언이 아니었다. 땡땡이치면 갈 곳 없는 학생들에게 만만한 곳이 당구장이다. 부모들은 귀신같이 찾아와서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곤 하였다. 지역에 따라 당구장에 견학 가는 학습이 연출되었지만 형식적인 교육의 장난 그 이상은 무리였다.


방치된 청소년들의 당구 환경을 뒤로한 채 상업사회는 당구 발전의 목소리에 합류하기 바빴다.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 빠르게 인재육성에 앞섰다. 이를 계기로 대학에 당구부가 창설되는가 하면 “대학당구연맹”이라는 단체도 생겨났다. 당구계의 공인들은 그 여세를 몰아 흐름을 주도하려 했다. 재료상과의 협업으로 고등학교에 당구대를 기증하는 형태의 발전을 주도했지만 적잖은 비용에 발목이 잡혀 고작 한두 번 시도한 것이 전부였다.


오늘날 금연법으로 확연하게 달라진 당구문화는 분명 예전과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매체에서 전해오는 변화의 울림은 여전하다. 무작위식 발전과 참여를 외치고 있는 변함없는 모습은 나만의 우려일까. 이로 인해 포획된 세상모를 자아는 오늘도 책임지지 못할 영역에서 방치되는 것은 아닌지. 건전성과 발전을 위한 도구로 이용당하는 것은 아닌지.


추석날은 황금연휴라서 매일같이 당구장을 들락거리기 바쁘다. 주인은 대목 장사하느라 정신없다. 아마도 서울 빼고는 전 지역이 바쁘지 않을까. 아무리 바빠도 오랜만의 만남을 외면할 수는 없다. 다소곳이 예의를 갖추며 건네는 인사는 어딜 가더라도 명절날의 미덕이다. 우리끼리의 거짓말로** 덕담이 시작되고 당구 한 게임을 즐겨본다. 큐 가방을 열고서 주위를 둘러보니 구석진 당구대에 고등학생 세 명이 보인다. 명절이라 용돈을 두둑이 받았나 보다.




* 큐 대 하나로는 게임 비용을 내지 않아도 되는 주인과 학생들과의 무언의 약속이며 전국 공통이다.

** 한동안 바빠서 당구를 치지 못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때로는 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