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창을 열자마자 해맑은 소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슬퍼하는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울고 있을까. 그것도 수많은 관중 속에서. 고민도 잠시 이내 한 남자가 다가서더니 자신의 머리띠를 벗어 훌쩍이는 소녀에게 살포시 씌워준다. 주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찬사를 보낸다. 테니스 선수가 관중 속으로 달려가 자신을 응원하던 소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장면이다.
짧은 영상은 팬과의 감동적인 장면들을 마구 담아낸다. 한 소년이 연신 ‘Oh My God’을 외치면서 눈물 흘린다. 야구선수는 자신을 응원하던 소녀를 운동장으로 데려와 시구해 보라며 공을 건네준다. 해맑은 미소가 한가득이다. 휠체어에 앉아 흐느끼는 아이 곁에 선수가 다가서며 무릎 꿇는다. 연신 무어라 말을 건네자 아이는 마냥 끄덕이며 눈물 훔치기 바쁘다. 음악은 왜 이리도 슬픈 리듬인지 작곡가도 분명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축구나 야구경기에서 팬들이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파도타기 하는 모습은 이제 우리에게 흘러간 유행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다음 개발도상국이 이어받겠지. 이후 터져 나온 응원구호 ‘아주라’는 부산의 사직야구장에서 서로에게 부딪치며 메아리쳤다. 이 역시도 유럽 문화를 끌어와 우리 것으로 만든 스포츠 문화의 모방이다. 흉내 낸 장면이 더 없을까. 창조된 감동이 혹시 어디엔가 숨어있지 않을까. 여기저기 훔쳐보지만 더 이상의 잔잔한 파도는 밀려오지 않는다.
감동은 관중과 선수가 한 몸이 되어야만 솟아나는 기운이다. 당구라는 스포츠는 우리에게 어떤 감동을 선사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승상금이 부러울 뿐 다른 무언가가 생각나지 않는다. 경기 자체에서 굳이 찾으라면 *예술 당구 종목인데 내가 치지 못해 돌아서면 금방 잊힐 잠깐의 흥미로움 뿐이다. 어려운 포지션에 관객의 시선이 조금 몰리겠지만 쉽게 내뿜을 수 없는 기량의 안타까움이 관중을 떠나보내기도 한다.
오래전 당구월드컵경기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입구에서 경기가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 두 명이 포스트를 보면서 얘기를 주고받는다. 한 친구가 “구경 갈까”라고 묻자 옆 친구는 “내가 다 칠 수 있는데 뭐 하려고 가냐”면서 핀잔을 준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조금만 볼을 다룰 줄 알아도 누구나 칠 수 있는 포지션을 선수들이 치고 있기 때문이다. 난구도 여러 번을 걸치다 보면 성공할 수 있으니 시시콜콜했을 것이다.
스포츠에서 흥미로움은 관객의 관심을 끌기 위한 중요한 요소다. 흥미로움에 짜릿한 감동을 더 한다면 뭘 더 바랄까. 그 흥미를 위해 프로와 아마추어에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당구공과 당구천의 화려한 칼라, 선수들의 자율복장, 치어리더의 응원, 반짝이는 조명, 등 색다름을 건네준다지만 네티즌들은 여전한 아쉬움을 토한다.
지난 이집트 월드컵이 떠오른다. 4강전이 막 시작되자 유럽 선수가 엎드려 타격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순간 관중석이 웅성거린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사람이 소곤거리기 바쁘다. 공인들이 관람을 위해 뒤늦게 찾아온 것이었다. 선수가 곧장 일어서서 심판에게 항의하자 경기장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추슬러지고 경기는 다시 시작되었지만 고요함을 파괴시킨 부끄러움이다.
당구는 뭐니 뭐니 해도 긴장감에서 오는 짜릿한 감동이 전부가 아닐까. 어려운 포지션을 몰입하여 풀어냈다면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스포츠 도입 초기에도 “경기(競起)”를 “긍기(兢起)”로 표기할 정도로 긴장감의 비중을 크게 생각했다. 떨림의 영역을 가장 많이 확보하는 스포츠가 당구 이외에 어떤 종목이 있을까. 심장으로 친다는 말이 있듯이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흔들림 없는 기량을 표현해야 하는 당구. 이런 긴장감이 배가되어 나에게 감동을 안겨준다면 세상 속 그 어떤 스포츠가 당구와 견줄 수 있을까.
* 1933년 조선일보 기사에서 예술 당구의 시작된 명칭을 엿볼 수 있었다. “당구 묘기 공개” “묘기, 사옥 십 점, 삼옥 이백 점, 스리-쿳숀, 급각곡구(及各曲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