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친구= 평생친구” 공식의 오류
나는 고등학교 친구가 없다. 스무 해 전, 한 사람의 집요한 가스라이팅 속에서 믿음이 무너졌다. 그 관계를 지우는 데 오래 걸렸고, 그 상처는 나를 바꿨다.
나는 늘 틀린 사람이었다. 그의 말 앞에서 내 판단은 무너졌고, 내 삶은 꼭두각시가 돼 갔다. 심지어 내 감정까지 부정당했다. 분노도, 불안도, 상처도 전부 내가 과민해서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몰렸다. 그 시절의 나는, 나 자신을 변호할 힘도 없는 피고인이었다.
이 낡은 문장이 모든 것의 발화점이었다. 고등학교 늦깎이 전학생으로 들어간 교실은 낯설고 불편했다. 이미 다 짜인 무리 안에 들어가는 게 버거웠고, 사춘기는 그 불편을 더 크게 키웠다. 힘들어도 괜찮은 척 버티던 내게 어느 날 A가 다가왔다.
예쁘장한 외모, 잘 통하는 말투, 겹치는 취향. 우리 사이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어느 날, A의 고백은 우리 관계를 더 두텁게 만들었다.
“사실.. 우리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야. 아빠가 사별하시고 재혼했거든”.
그때부터였다. A는 나와 비밀을 공유하는 ‘가장 친한 친구’가 돼 버렸다. 다른 친구들과 거리를 두는 건 당연해졌다. 어느새 내 곁엔 A만이 남아있었다.
A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마음이 든 순간, 이미 관계는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쉬는 시간. 우리는 평소처럼 교실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난 용돈 10만 원을 가지고 뭘 살지 고민 중이었다.
며칠 뒤, A가 날 찾는다.
“나, 임신했어. 애 지워야 해. 돈이 부족해. 돈 좀 빌려줄래? 왜 그 돈 있잖아…”
충격적이었다. 동시에 강렬한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돈 노리고 내게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친구를 의심하는 내 자신이 더 최악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직감을 묻어버렸다.
넋이 나간 내게 A의 말이 길어진다.
“저번에 내가 말했지? 내 중학교 친구가 애 지웠다고. 어쩜 똑같이 임신하고, 애를 지우냐? (웃음) 우린 뼛속까지 진짜 친구인가 봐. 너도 돈 빌려줄 거지?”
그 순간 직감이 경고음을 울렸다. ’이건 처음부터 내 돈을 노린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소리를 무시했다. 내가 틀렸다는 말이 더 두려웠으니까. 그때의 난 ’진짜 친구‘라는 이름을 잃는 게, 사기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낙태 수술 당일 저녁, 혼자 있기 무섭다는 A의 요청에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A는 배에 붕대를 감은 채 거실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통화가 길어진다. 2시간 넘게 남자친구와 싸우고 있다. 조용히 방에서 기다렸다.
“이 상황....뭐지?” 수없이 묻고 싶었지만, 내 답은 늘 같았다. "친구니까 옆에 있어야지"
며칠 뒤, A는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가 빌려준 돈 얘기는 쏙 빼고, 오히려 내가 갖고 싶어 고민하던 것들을 쇼핑 목록처럼 늘어놓았다.
내가 빌려간 돈부터 먼저 갚으라고 하자, A는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너 진짜 친구 맞아? 내 걱정보다 돈이 먼저야?”
비정상 취급을 받은 건 나였다. 그리고 A는 3만 원짜리 리바이스 리폼 청치마를 내밀며, 나머진 하루에 천 원씩 갚겠다고 했다. 7만 원을 하루 천 원씩 70일 동안 갚겠다는 미친 소리였다. 이 역시 통보였다.
기가 찼다.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때의 나는 화를 내야 하는지도 몰랐다.
대학생이 되자, 나는 A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했다. 새로운 친구들과 즐거운 일상을 보내며 해방감을 느꼈다. 그런 내게 A는 꽤 노골적으로 질투했다.
싸이월드가 유행이던 시절, A가 내게 말했다.
“네 싸이월드 계정 나랑 같이 공유하자. 나는 계정을 안 만들거야. 네 계정으로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일기 쓰고 싶어. 우린 제일 친한 친구잖아”
당연히 거절했다. 하지만 A는 ‘제일 친한 친구’임을 강조하며 집요하게 괴롭혔다.
결국 난 내 계정을 공유해 줬고, A는 어느 순간 내 지인 계정까지 들락거리며 날 염탐하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랑 방명록을 주고받는지, 댓글에는 뭘 썼는지까지도.
심지어 내 친구와 자기 중 누가 더 예쁘냐는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계속 하며,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A가 갑자기 내 엄마의 신용카드를 빌려달라고 졸랐다. 남자친구랑 롯데월드 가야 하는데 엄마 신용카드로 할인받겠다는 것이었다.
A의 부탁은 항상 이해하기 힘들었다. 또다시 거절했다. 그러자 내가 거절한 게 잘못됐나 싶을 정도로 불같이 화를 냈다. 마치 내가 의리를 저버린 것처럼 막무가내다.
“우리 아빠는 너 결혼할 때 가구 해준댔는데, 너 진짜 너무 치사하다.”
질렸다. 나는 관계 정리를 위해 긴 장문의 메시지를 ‘싸이월드 비밀 다이어리’에 써놨다. 그걸 본 A는 단숨에 찾아와 아쉬운 소리와 자기변명을 쏟아냈다.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러면서 내가 자기를 위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또다시 나를 앞세워 교묘하게 상황을 피해 간다.
결국 나는 괜한 미안함에 호구처럼 그날 먹은 파르페 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나는 끝없이 나쁜 친구가 되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절연을 고민하는 순간마다, 머릿속에서 같은 문장이 맴돌았다. “고등학교 친구가 평생 간다.”
그 문장은 항상 내 발목을 잡았다. 내 단 하나의 고등학교 단짝. A가 사라지면 나는 평생 고등학교 친구 가 없는 사람이 될까 너무 두려웠다. '평생'이라는 단어는 사춘기 소녀에게 창살 없는 감옥 같았다.
그때의 나는 나약하기도 했지만, 혼자 남을 용기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그 손아귀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더 지독한 건, 이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