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었다

폭우 속 배운 인생 교훈

by 움직이는케이

글을 쓰다 보면 내가 텅 비는 순간이 온다. 내 얘기를 녹인 글에는 모든 기운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난 쏟아낸 그 마음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게 원고가 밀리고, 한참을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했다.


그래서 균형을 잡고 싶었다. 힘을 빼고 쓰자는 마음으로, 이 매거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또 다른 글에서 힘을 다 쏟아내고 나면, 여기서조차 멈춰 있었다. 강박이 만든 벽이었다.


그 벽을 깨준 건 엉뚱하게도 여행이었다. 갑자기 가게 된 일본에서의 마지막 날, 폭우가 도시를 삼켰다. 호우경보, 바람주의보, 해일주의보, 홍수주의보, 낙뢰주의보까지 동시에 발령됐다.


기록적 폭우였다. 때마침 밖에 있던 우리 가족은 좁은 버스정류장에서 비바람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애들을 감쌌지만, 자연 앞에 인간은 너무나 초라했다. 막내는 울고, 우산대는 두동강이 났다. 흠뻑 젖은 몸으로 냉방이 켜진 실내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막내의 입술이 파랗다. 우버는 잡히지도 않는다. 호텔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왔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일단 가자.“

비가 잠깐 멈췄을 때, 우리는 그냥 걷기로 했다. 호텔까지 약 10km. 차로 2~30분 거리. 남편과 큰아이가 앞서고, 남편과 내가 번갈아 막내를 안고 걸었다. 비가 쏟아지면 잠시 멈추고, 잦아들면 다시 걸었다. 우버를 계속 호출했지만 소용없었다.


우리의 답은 단순했다. 발로 나아가는 것. 그거밖에 할 수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렇게 한참을 걷다, 호텔까지 1시간 남은 거리에서 기적처럼 택시를 잡았다. 그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과 함께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 살았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알고보니 그날 갑작스런 폭우에 JR지하철 운행은 중단됐고, 택시비 폭등으로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노숙한 이들도 많았다고 했다. 예상 못한 물폭탄 속에서 무작정 걸어간 우리 발걸음은 틀리지 않았다.


그날의 경험이 내 글쓰기와 겹쳐졌다. 마음에 들 때까지 쓰고 지우기만 반복하는 내 강박적인 습관. 사실 답은 명료하다. 그냥 쓰는 것. 글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중요한 건 때론 계산이 아니라 움직임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글을 그렇게 쓰려한다. 구독자가 많든 적든, 반응이 있든 없든, 일단 써본다. 그래, 언젠가는 닿겠지. 힘은 빼되, 멈추지 않는다. 그날의 폭우 속에서 배운 교훈은 단순했다.


그냥 걸으면 된다. 그냥 하자.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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