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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아테네 민주정,탐욕의 덫에 걸리다.

by Plato Won
Plato Won 作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철학은

그리스 문명의 상징입니다.


기원전 6세기경 아테네의 정치가였던 클레이스테네스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한 참주정을 몰아내고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치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나아가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도록 함으로써

직접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었는데,

근대 서양인들이 아테네를 민주주의의 발상지이자

근대 민주주의의 시초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노예, 여자, 외국인을 제외한 시민에게만

참정권을 제한적으로 부여했으며,

장군 등 특수직종을 제외하고는 모든 관직,

심지어 재판의 배심원들도 모두 추첨으로

뽑았다는 점에서 오늘날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는 간접 민주주의와는 다릅니다.


“똑같은 사람에게 똑같지 않은

권력을 부여하는 사회나,

똑같지 않은 사람에게 똑같은 권력을

부여하는 사회나

불공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테네의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깊은 불신이

묻어나는 대목입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그리스 문명의 상징인 아테네의 민주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정치학>에서

민주정을 배척하고 혼합정을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꼽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정이 외면 받게 된 이유는

아테네의 번영과 몰락의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폴리스로 이루어진 그리스에서

대표적인 도시 국가를 꼽자면

단연 아테네와 스파르타입니다.


그중 먼저 주도권을 잡은 아테네는

해양국가로 번성하였고, 노예 제도의 발달로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아테네 시민들은

아고라 광장에 모여 토론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와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결성한

동맹의 맹주로, 4년마다 올림픽을 개최하며

유대 관계를 강화하였고,

대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철학자 플라톤도 청년시절

올림픽에 레슬링 선수로 4번씩이나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올림픽은 당시 그리스 연합체를 결속하는 축제였습니다.


기원전 5세기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러

아테네는 정치적ㆍ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고,

미술ㆍ문화ㆍ사상의 중심으로

시대를 대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되 소박함이 있고,

지혜를 사랑하되 유약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생활에서 관대함을 갖고 교류하며,

공적인 일에서 두려움을 갖고 법을 지킵니다.”


페리클레스는 자유와 평등을

아테네의 민주정의 기본 가치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희석되지 않은 자유의 포도주”에

흠뻑 취한 아테네의 시민들은

외세나 권력의 부당한 지배뿐만 아니라

관습과 법의 지배까지 구속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수의 손에 의해 운영되는 민주정 하에서

사람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과

돈벌이 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무관심”은

결국 ‘자유’를 ‘무질서’로,

‘평등’을 ‘불공정’으로 바꿔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아테네 민주정은

모든 지배의 부정을 뜻하는

‘아나르키아(anarchia)’,

즉 무정부 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또한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뒤,

동맹국들을 종속국으로 만들려다

스파르타의 반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였고,

스파르타 동맹국에 패한 아테네는

서서히 멸망의 늪으로 빠져들고

마침내 그리스 전체가 그리스 북부

변방 국가였던 마케도니아에 멸망하며

그리스 문명의 종말을 맞게 되고

패권을 알렉산드 대왕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스 문명을 대표하는 아테네의

민주정은 왜 허무하게 무너져내린 것일까요?


아테네 시민들의 통제되지 않은

탐욕이 결국 서양 문명의 기원인

그리스 문명을 몰락의 길로

끌어들인 것이지요.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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