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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Nov 11. 2022

2-1노자,말할 수 없는 도를 말하다 추상화 읽기

추상화 스크립트

노자와 장자 표지 디자인
보일듯 말듯한 모습,道


노자의 道徳經과 장자의 荘子

2권 1과 <추상화 읽기> 스크립트


노자, 말할 수 없는 도를 말하다


(1) 도, 새로운 질서의 출현


춘추 전국 시대 이전에는 인간과 사회, 자연을 둘러싼 여러 현상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천명사상이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철기 문명의 본격적인 보급을 계기로 정치,

경제 면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지배 질서의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하늘이 세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산산 조각 났고, 사람들이 기댈 것이라고는 오직 인간인 자신들뿐임을 깨닫게 되지요.


천명사상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의미하는 ‘도(道)’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노자와 공자는 천명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의 도를 모색하고 현실에서 구현하려 했던 ‘중국 최초의 철학자’입니다.


공자가 인간 내면의 ‘인(仁)’에서 영감을 얻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예(禮)’라는 가치 규범을 중시했다면,노자는 자연이라는 ‘사실’의 세계에서 인간 질서의 근거를 발견하고 이를 ‘도’라 명명하게 됩니다.


따라서 도의 출현은 중국 문명에서 최초로 터져 나온

‘인간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도와 이름 그리고 언어


『도덕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인 ‘도’는

노자 사상의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라고 부르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 지어 부르는 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는 『도덕경』 1장의 서두에서부터 역설을 선보입니다.


그가 도를 도라 말할 수도 없고, 이름으로 개념을 규정할 수도 없다고 단언한 이유는 언어의 한계 때문입니다.


언어는 사물에 임의로 이름을 붙여서

그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한 기호입니다.


그런데 변화무쌍한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세계와 달리,

‘이름’은 다른 대상과의 구분을 위해  세계의 일부를 특정 내용 안에 가두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지요.


결국 언어는 대상의 한 가지 면만 보여 줄 수 있을 뿐,

세계의 본질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도는 인(仁)이다.”라고 언어로 정의하는 순간,

인이 도가 아닐 가능성, 다른 것이 도일 가능성은 모두 배제되고 맙니다.


도를 언어라는 좁은 틀에 가둘 경우, 그 속에 담긴 세계의 참모습이 아니라

‘도’라는 말 자체에 주목하게 되는데, 노자는 이를 경계한 것입니다.


(3) 도는 말할 수 없으나 만물의 근원이다


노자는 도를 도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고

첫장부터 강조하고 있지만,언어의 마술사 답게

5000여 글자로 도의 세계에 대해서

반어법과 역설로 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도의 세계는 일상의 인식의 한계를

뒤집듯,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도의 세계를

규징짓는 잘못을 경계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도는 오로지 있는 듯 없는 듯 황홀할 뿐이다.

황홀은 없는 듯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체를 잡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 황홀 속에 우주 만상이 있고

황홀 속에 천지만물이 있다.


도덕경 21장 구절입니다.


도는 깊고 그윽하여 그 안에 일체 생명의 씨앗이

깃들어 만물의 근원이 되고 자연을 깊이 바라보면

천지만물은 無에서 有로,有에서 無로 순환함을

알 수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천지는 비어 고요하지만

따스한 기운이 일어나 봄이 오면 만물이 피어납니다.

밤의 고요와 적막에 만물이 사라졌다가 아침에

동이 트면 만물은 기지게를 켜고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有와 無의 조화가 우주의 이치인

道인 것입니다.


텅 비어 있고 신묘한 도는

천지만물을 낳는데

그 작용이 무궁무진하다.

천지만물이 도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도를 의지하여 천지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새로워지기를 그침이 없다.

이들을 움직이는 근본은 흐리멍텅하여

없는 듯하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무심하여 형상이 없지만 그 작용은 오묘하다.

이를 현묘라 한다.


도덕경 6장 구절입니다.


도는 생명을 산출하는 자궁의 문이라

어두운 것과 같은 이치니 아무리 써도 다하여

없어짐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어떤 무엇이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으니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변하지도 않고

두루 편만하여 계속 움직이나

없어질 위험이 없다.

가히 세상의 어머니라 하겠다.

나는 그 이름을 모른다.

다만 억지로 도라 불러본다.

구태여 형용하라면 크다고 하겠다.


25장 구절입니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인간이 지닌 언어의 한계성으로

이를 특정할 수 없고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보듯, 인간이 대상과의 관계를 인식하려면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명명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름을 뜻하는 한자 ‘명(名)’의 생김새를 보면,

‘저녁 석(夕)’ 자 아래에 ‘입 구(口)’ 자가 붙어 있습니다.먼 옛날,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어  이름을 붙여 부른 것이

이 글자의 유래라고 합니다.


초창기에는 사물과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함께 존재했을 것입니다.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물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기도 했고,볼 수 없는 것,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에 이름을 붙이기도 했지요.


행복과 예술, 용(龍)과 신(神)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처럼 추상적인 것까지 표현하는 기능을 지녔기에

‘이름’, 즉 언어는 제도, 관습 등의 인위적인 문화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공자는 이름과 사물이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이를 정명(正名) 사상이라 부릅니다.

정명은 바른 이름이란 뜻으로, ‘명분을 바로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부모는 부모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라는

말에서 보듯,공자는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주어진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일차적 과제라 보았습니다.


이처럼 이름의 중요성을 강조한 유가의 주장은

‘유명론(有名論)’이라 불리는데, 이름은 곧 언어입니다.따라서 유가는 언어를 통한 배움,

즉 학문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지요.


이에 비해 이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이름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도가의 주장을 가리켜 ‘무명론(無名論)’이라 부릅니다.


모든 사물은 유한하므로, 대상이 사라지면 그 이름도 사라지기 마련입니다.이름, 즉 언어에 집착하지 않으니, 도가의 배움은 학문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요.


노자는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져도 영원히 남아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천지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이것을 ‘도’라 불렀습니다.


도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명(無名)이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늘 그러한 도’인 상도(常道)’이며  ‘늘 그러한 이름’인 상명(常名)입니다.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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