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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삶'과 '자유로운 삶'

1-3,‘자연스러운 삶’의 노자 vs. ‘자유로운 삶’의 장자

by Plato Won
Photo by Plato Won


(1) 문화의 어원


중국에서 ‘문화(文化)’는 ‘천지자연’ 또는

교화되지 않은 상태인 ‘야만’과 대조적인 의미로 쓰여 왔습니다.


영어로 문화를 뜻하는 ‘컬처(culture)’도

‘밭을 경작하다, 신체를 훈련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콜로레(colore)’에서 나왔지요.


인간의 손때가 묻은 것은 문화,

그렇지 않은 것은 자연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동서양에서 말하는 문화란 자연과 대립되는 ‘인위’, 또는 자연 상태의 사물에 인간의 힘을 가하여 변화시키거나 새롭게 창조해 낸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문화는 인류가 오랜 유목 생활을 끝내고

정착 농경에 접어들었을 때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요.


(2) 북방 문화의 유가 vs. 남방 문화의 도가


중국 문화가 중앙부의 화이허강을 기준으로

북방 문화와 남방 문화로 나뉘게 된 데에는

자연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후의 차이가 문화의 차이를 낳았고,

각기 다른 문화에서 자란 인물들이 서로 다른 기질을 갖게 됨으로써 사상 면에서도 뚜렷한 대조를 보인 것이지요.


북방 문화를 대표하는 사상은 노나라 출신 공자의 ‘유가’입니다.


한랭 건조하고 황량한 북방은 밭농사 위주였기에 이곳 사람들은 강인하고 투쟁적인 기질을 지녔습니다.


북방에서 발생한 유가가 근면, 성실과 같은 인간의 노력과 문명의 힘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에 맞서는 남방 문화의 대표 주자는 초나라 출신 노자의 ‘도가’입니다.


고온 다습하고 비옥한 남방은 논농사 위주였기에 사람들의 기질도 온화하고 자유분방합니다.


이는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도가의 특징과 잘 부합하지요.


(3)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무위의 삶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사람은 ‘강하고 똑똑한 자가 최고’라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힘과 지식은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지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노자는 이러한 생각이 편견에 불과하다며 다음과 같은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기 쉽지만, 부드러운 것은 온전하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어 보인다.”


노자는 세상의 모든 다툼이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되고, 모든 죄악도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임을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선망하는 힘과 지식을 좇지 말고, 부드러움과 어리석음을 추구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진정한 ‘도’는 부드러움과 어리석음에 더 가깝다는 뜻이지요.


무게중심을 ‘배움’에 두고 ‘성인(聖人)’을 목표로 노력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경쟁과 차별을 낳는 유가와 달리,

‘도’에 무게중심을 둔 도가에서는 ‘무위’를 강조합니다.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보태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

덜고 또 덜어 내서 무위의 경지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


이처럼 반어와 역설을 통해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본 노자. 그가 활동했던 춘추 시대 말기에는 박식하거나 힘 있는 자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런 현실이기에 상식을 뒤엎는 노자의 위험한 발언이 오늘날 오히려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요?


(4) 삶의 주인으로서 누리는 자유


장자는 ‘인간들 사이의 대립과 차별’이 가장 큰 문제라는 노자의 문제 인식에 동의하고, 노자의 해법인 ‘무위’의 삶에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그가 평생에 걸쳐 탐구한 것은 ‘진정한 자유’의 문제입니다.


장자가 한가롭게 낚시를 하고 있을 때,

초나라 임금이 대부 두 사람을 보내 정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이렇게 대답하지요.


“초나라에 신령스러운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3,000년이 지났고

비단에 싸여 묘당에 보관되어 있다지요. 당신이 이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존귀한 대접을 받고 싶소,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겠소? “


두 대부가 후자라고 대답하자 장자가 말합니다.


“가 보시오. 나는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며 살 테니.”


장자는 가난 속에서도 권력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갔습니다.


진정한 자유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법입니다.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중시하는 장자의 태도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속 히슬로다에우스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그는 작중 모어가 관직을 제안하자,

왕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며 단칼에 거절했었지요.


아마도 장자 또한 이런 당당함과 의연함을 갖추었기에 유가와 묵가에 대해 ‘인간의 삶을 옥죄는 사상’이라며 날 선 비판을 던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노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물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혁명적 발언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4) 추상화 이해하기



이제 추상화를 통해 노자와 장자를 들여다볼까요?


눈의 형상을 닮은 듯한 포물선이 보이네요.

그 안에 산과 골짜기, 하늘과 물의 풍경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오감 중에서 시각에 가장 많이 의존하지만,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편견과 이기심이 진실을 가려서

각자 ‘보이는 대로’ 판단하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약육강식이 판을 치던 춘추 전국 시대,

권력과 부귀영화를 얻고자 혈안이 된 사람들은 끝도 없이 경쟁했습니다.


눈동자를 둘러싼 짙은 풀빛은

현실을 바라보는 노자와 장자의 남다른 시선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사물과 현상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습니다.


눈동자 안의 풍경이 바깥세상과 자연스레 이어졌네요.


‘도’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각각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큰 하나’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눈동자를 연상시켰던 포물선이 이제는 다리처럼 보이는군요.


바람인 듯, 구름인 듯 보이는 물결 모양은

노장사상의 ‘도’가 지닌 자연스러움, 신비로움을 상징합니다.


각각 위와 아래의 구슬을 바라보는 두 사람.

노자가 바라보는 위쪽 구슬은 큰 원이 작은 원을 품고 있는 형태로, 큰 원은 국가를, 작은 원은 개인을 상징합니다.


개인과 국가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노자의 이상이었습니다.


장자가 바라보는 아래쪽 구슬은

큰 원 안에 작은 원 여러 개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탐구했던 장자가 개개인의 삶의 태도에 더욱 주목했음을 의미합니다.


노자와 장자가 마주 보면서 두 개의 구슬도 서로 겹쳐집니다.


사물과 현상을 세세하게 구분 짓지 않고

큰 틀에서 하나로 보는 것이 노장사상의 특징입니다.


둥근 원이 천지만물을 감싸듯이,

나와 타인, 인간과 자연의 구분 없이 모든 것을 포용하고자 했던 노자와 장자.

현실에 대한 남다른 시각과 통찰력으로

시대를 앞서간 이들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줍니다.


회색 구름이 하늘을 가릴지언정 태양까지 삼킬 수는 없듯, 혼탁한 세상살이가 삶을 번거롭게 할지언정 삶의 주인으로서

누리는 자유까지 제단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노자의 '도의 정신'과 장자의 '자유정신'을 따르면 세상은 여전히 평화롭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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