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대만의 반도체 공급망을 대체할까?
23년 12월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Nvidia)의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이 1주일간 일본-싱가포르-말레이시아-베트남 4개국을 연달아 방문해 각국 총리들과 만남을 갖었다. 요즘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미국 반도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라고는 하지만 1주일간 4개국 정상들과 연달아 회담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게다가 젠슨 황 개인적으로 싱가포르는 25년 만의 방문이고 말레이시아와 베트남은 자신 인생 첫 방문지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반도체 업계와 세계 주요 언론들은 젠슨 황이 각국을 방문할 때마다 엔비디아가 이들 방문 국가에서의 주요 투자 계획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본은 한국에 한없이 뒤처진 반도체 산업 부활을 위해 2022년 도요타, 소니, NTT, 소프트뱅크 등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 8곳이 합작해 ‘차세대 반도체’ 기업 Rapidus를 설립했다. 일본은 북부 홋카이도 지방을 일본 실리콘벨리로 삼고 5조 엔 (원화 45조 원) 규모 프로젝트로 기반을 조성 중이다.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에서 삼성과 TSMC가 치열하게 개발 경쟁 중인 2 나노 반도체를 일본에서도 만들겠다는 심산이다.(분량 넘칠 시 삭제) 일본 정부는 수요가 몰린 GPU의 일본 우선 공급을 요청하고 엔비디아의 일본 투자를 요청했다. 하지만 젠슨 황은 ‘일본의 GPU 수요를 우선시하고 인공지능 AI 연구개발에 초점을 둔 연구개발센터 설립 방안을 모색하겠다’며 뜨뜻미지근한 입장을 밝히는데 그쳤다.
하지만 아세안 국가들 방문에서 젠슨 황의 반응은 뜨거웠다. 12월 8일 젠슨 황은 말레이시아에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동남아시아는 기술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될 것’이라며 ‘이미 패키징, 조립, 배터리 분야에서 매우 뛰어나며 기술 공급 측면에서도 훌륭하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아세안 지역에서 반도체 및 시스템 설계’, ‘데이터 센터 운영’, ‘소프트웨어 설계’, ‘소프트웨어 운영 및 서비스’ 등의 분야로 진출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에서 성공 가능성’을 보았다며 호평했다.
말레이시아에 대해서는 인공지능(AI) 분야 세계 20위 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해 엔비디아가 인공지능 학습 및 연구를 위한 우수센터 설립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말레이시아의 인공지능 클라우드 시스템 구축 지원을 통한 인공지능 생태계를 조성하고 전력 인프라 기업인 YTL과 협력해 2024년까지 말레이시아 최초의 슈퍼 컴퓨터를 탄생시킬 것이라고도 했다. 말레이시아는 인공지능 데이터 센터 구축을 위해 엔비디아와 43억 달러 (원화 5조 6400억 원) 규모의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앞서 12월 6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미디어 회의에서 ‘싱가포르는 AI 개발 허브로서 향후 3~5년 내에 엔비디아가 15,000명의 AI 전문 인재 풀을 양성하겠다’고 했으며 엔비디아가 싱가포르에서 운영하고 있는 기존 슈퍼컴퓨터보다 더 큰 슈퍼컴퓨터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젠슨 황의 이번 동남아 방문 절정은 베트남에서였다. 12월 11일 베트남 기획투자부가 주최한 반도체 산업 및 인공지능 발전에 관한 세미나에서 젠슨 황은 ‘베트남은 인공지능 개발에 준비가 되어있으며 베트남의 인력 역량과 인프라 개선에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베트남을 엔비디아의 제2 고향으로 만들겠다며 베트남에 반도체 설계 센터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한국과 더불어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곳은 대만이다. 이미 충분한 인프라와 인력이 잘 갖추어진 대만에 인공지능 데이터 센터와 최신 반도체 생산 시설을 늘리면 될 것을 굳이 아세안 지역으로 늘리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각기 세계 7위와 9위의 반도체 생산 국가라고는 하지만 대만에 비할 바는 못된다. 게다가 베트남은 반도체 불모지에 가까운데도 엔비디아의 선택을 받은 이유에 대해 반도체 전문가들은 쉽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안정적 반도체 공급 = 미국의 안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아야만 알 수 있다. 중국의 계속적인 대만에 대한 위협 때문에 미국은 대만을 대체할 생산 기지로 아세안을 낙점하고 구축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미국과 NATO 동맹국인 유럽은 그간 중국에 집중되었던 글로벌 공급망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것이 국가 안보에 직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자동차를 제때 인도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반도체에 무지하던 미국 정치인들 마저도 반도체 안정적인 공급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미국은 자신들을 위협하며 빠르게 성장한 중국의 기술 발전을 끊어 놓아야 한다는 목표로 중국으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하고 미국으로 반도체 제조 시설을 투자하게 하고 있다. 또한 미국 동맹인 나토 지역에 대만에서 공급받는 것보다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중심으로 폴란드, 이탈리아, 아일랜드에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위해 제조 시설을 확장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외교, 안보 언론인 ‘더 디플로맷’, ‘더 힐’ 마저도 지속적으로 반도체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더 디플로맷>은 23년 12월 1일 ‘ASEAN은 대만 반도체 산업에 대한 미국의 의존도를 줄이는 열쇠를 쥐고 있다’, <더 힐>은 23년 4월 1일 ‘반도체 반보호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 등의 보도와 칼럼에서 전 세계 반도체의 50%가 대만에서 공급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를 분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의 보수 싱크탱크인 CSIS 역시 22년 6월 칼럼을 통해 ‘최첨단 반도체 대부분이 대만 한곳에 집중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공급망의 탄력성과 보안의 의미를 재정의 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의 12월 21일 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중국산 칩으로 인해 국가 안보 우려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반도체 공급망과 국방 산업 기지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의 국방안보 컨설팅 기업인 카브인터내셔날 23년 11월 <반도체가 국가 안보 이점을 강화하는 방법>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반도체가 군사 기술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며 ‘통신 시스템, 자율 차량, 인공지능 방어 기술은 현대 군사 작전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군사 기술에도 인공 지능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뒷받침해 줄 첨단 반도체 공급이 국가 안보에 직결된 것이다. 그간 미국에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던 대만이 중국의 침공받을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만으로부터 반도체 공급이 불안정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중국이 대만의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게 되면 더욱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을 미국은 원하지 않게 되었다. 엔비디아의 아세안 투자는 ‘반도체=미국 안보’라는 측면에서 이해를 하고 미국의 ‘대만 떠나기’ 준비 측면에서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