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일부러 가족과 떨어져 보내는 추석

저는 정신과 환자입니다.

by 이너브

이번추석도 저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세기도 어려울 만큼 명절을 혼자, 따로 보냈네요.

조부모님 얼굴 안 뵌 지도 그만큼 오래되었죠.


이번 가족 단체톡방에 아버지가 시골에 계신 조부모님과 식사하는 모습을 찍어서 올리셨어요.

안 뵌 지 오래되어서 저는 검게 기억하고 있었던 조부모님의 머리카락이 이제는 희더군요.

전화도 드리기가 점점 꺼려집니다.

예전에는 할 말을 억지로 지어내서 통화 시간을 길게 늘리는 게 싫어서 피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그런 것도 있고 목소리가 서로 마주하는 것 마저 힘이 드는 것 같아요.


엄마 목소리 마저 마주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동생과 사는데, 동생이 엄마랑 통화를 하는 것조차 옆에서 보고 듣고 있기가 힘들어 방으로 자리를 피했죠.

동생과도 대화를 안 하고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제는 가족들도 저의 행동으로 저의 컨디션을 조금은 파악하는지, 제가 방으로 자꾸 숨어들면 동생도, 엄마도 다른 가족들도 저를 방밖으로 꺼내지 않습니다.

그런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저도 모르게 방 밖으로 나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 옵니다.

동생이랑 같이 밥을 먹어볼까, 하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결국 다시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게 되지요.


제일 최근에 제가 방 안으로 숨어든 기간은 1주일 정도였습니다.

그전에 방 안으로 숨었던 기간은 2주가 넘었으니까, 절반 정도 줄었네요.

이게 제가 병의 진행을 알 수 있는 지표 중 하나입니다.


방 안으로 숨어든 원인을 딱 잘라 말하긴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스트레스 상황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저를 방 안에서만 생활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참을 수 있는 선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어쩌면 '선'의 형태가 아니라 '면'이거나 '입체'라 가늠이 안 되는 걸까요.

그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 그 경계에 도달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대처를 할 수 있을 테고 그럼 방 안에 숨어드는 일도 줄어들 텐데 말이죠.


저는 사춘기 즈음부터 저만의 컨테이너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때도 본가에서 독방을 쓰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냥 아무도 존재하는지 모르는 컨테이너가 있어서 저만의 아지트로 삼고 싶었죠.

그 컨테이너에서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은 소리 내어 엉엉 울기였습니다.

제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도 않고, 제가 말끔히 운 흔적을 지우고 컨테이너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시간이 흘러 저는 성인이 되었고, 혼자 자취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원룸이 제가 생각했던 컨테이너는 아니었던 거 같아요.

원룸은 여전히 제 울음소리를 다 막아주지 못하고, 가족들은 원룸의 존재를 알아서 제가 원룸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안부를 물었으니까요.

제가 원하는 컨테이너의 조건은 아까도 언급했듯이,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몰라야 하는 공간이니까요.


추석 하루 전날, 대학 친구가 제 집에 놀러 와 하루 자고 갔습니다.

그 친구도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병원을 다니고 있어 저랑 연락을 자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공감 못하는 것들이 우리 사이에선 너무 쉽게 이해가 되는 경우가 있어서요.

그 친구와 대화하며 오랜만에 컨테이너를 떠올렸습니다.

저도 잊고 있었는데, 제 우울의 시작이 어디었을까를 이야기하다 컨테이너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곤 깨달았죠, 컨테이너를 처음 바랬던 때가 사춘기 즈음이니까 그전부터 내 우울은 시작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그 누구도 저에게 딱 집어서 언제가 우울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정신과 전문의, 심리 상담 전문가 여러 명이 제 인생을 들여다봐도 콕 짚어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잊고 있었던 컨테이너를 다시 떠올렸듯이,

브런치스토리에서 글을 쓰다가 제가 잊고 있었던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길 바랍니다.

그렇게 기억 조각들이 맞춰지다가 제 병을 회복하게 도움을 주는 실마리를 찾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런 정신적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어떤 느낌인지 그 주변 사람들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앞으로 이곳이 제 컨테이너가 될까요

궁금하네요


PS. 저는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이 엉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으시는 분들께 감사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