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여전히 길지만 빛이 드는 시간도 길어진다
나는 한여름을 지나가다도 어느 날 갑자기 한 줄기 냉기를 느낀다. 그럴 때면 아 이렇게 숨 막히도록 덥지만 가을은 어김없이 오겠구나, 이제 곧 선선해지겠구나 생각하며 마음 한 켠에 서걱 베이는 소리를 듣곤 했다. 가을 공기와 겨울 냄새가 너무 좋으면서도 싸르르 시린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 계절들이 참 좋고 설레었다. 가을의 가디건과 스카프, 겨울의 코 끝 시린 쨍함, 노란 불빛 그런 것들.
여름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살아서인가, 나는 이제 5월부터 8월, 그러니까 초여름에서 여름의 날씨가 좋아졌다. 드디어 좋아하는 계절이 바뀐 것이다. 가벼운 옷차림, 청량하고 환한 날씨가 이제 정말 좋다. 어딘가 센치해지는 가을도, 눈 내리는 겨울의 캐럴도 여전히 즐기지만 더 기대되는 마음은 여름이 차지했다.
그저께 늦은 오후, 아이와 함께 나란히 누워있는데(아기 낮잠 시간이라 매일 비슷한 시간 즈음에 함께 눕는다), 집 밖의 도로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봄'을 느꼈다. 이상한 얘기지만 분명히 완전 한겨울에 들리는 소리의 톤과는 차이가 있었다. 해가 길어지고 공기가 더 따뜻해지면서 뭔가 귀에 들려오는 소리도 미묘하게 바뀌는 것이다.
꽃샘추위도 남았고 눈이 더 올지도 모르고 생각보다 한참을 더 무거운 옷 속에서 지낼 수도 있지만 봄은 어김없이 문을 두드릴 것이고, 5월도 그리고 쨍한 여름도 찾아올 것이다. 지금 난 겨울을 살고 있으면서도 얼마 전과는 또 다른 겨울을 지나고 있다. 해는 점점 짧아지고 밤은 자꾸 길어지는 첫 번째 겨울을 벗어나, 어둠보다는 빛의 시간이 틀림없이 더 길어지는 두 번째 겨울의 길목에 들어섰다. 늘 바뀌지만 늘 틀림없는 계절의 존재가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