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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Dec 10. 2022

나의 수치를 대면하는 일

아니 에르노, <여자아이 기억>

수치스러운 기억이 있는가. 나는 있다. 드글드글 끓는 지렁이들을 깊이 묻어 버리고도 혹시 내 눈에 띌까 싶어 밟고 또 밟은. 뚜껑으로 덮고 그걸로는 모자라 가장 무거운 돌들을 찾아 올려놓고, 절대 열리지 않게 덮고 또 덮은. 그랬는데도 어떤 계기로 의지와 상관없이 한 마리라도 탁 튀어 오르면 팍 죽고 싶은. 그러나 살아 있다.


수치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


여기에는 그러니까 두 시선이 끼어든다. '타인에게 보이는 나'와 '내가 보는 나'. 나 같은 경우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남이 볼까 봐 알까 봐 무섭고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해서 찝찝하고 두려운. 그러나 결국에는 나 자신이 제일 싫어지는 그런 일. 그 일의 절대적, 객관적 경중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내가 나의 어떤 단계에서 그 일을 겪었는가, 그 일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했는가, 당시에 혹은 이후에 어떻게 반응했느냐에 따라 무수히 얽히고설킨 가지를 뻗는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 작가, 아니 에르노가 자신에게 일어난 50년 전의 한 사건에 대한 얘기를 쓴다. 그 일은 "복종도 동의도 아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혹은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하고 간신히 생각하게 하는, 현실에 대한 당혹감일 뿐(8면)"인 그런 일이다. 작가는 '현실에 가능한 한 가장 가까이 도달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을 찾으려는 집요함(134면)'으로 이 일을 집요하게 복원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주인이지만 사건의 주체는 아닌 '그녀'를 해체한다.


"글쓰기의 가능성이 많아지는 건 우리가 경험하는 그 순간, 경험하는 것의 의미가 부재하기 때문이다.(211면)"


그러니까 우리는 그 사건이 내게 일어나는 그 순간에 '그게 뭔지 모르고 그냥 겪는다'. 그 순간에 어떤 일이 나를 통과하듯 지나가며 벌어진다. 글을 쓰는 건 사후이고, 그를 통해서 어떤 의미가 부여된다. 고정된 답이 있는 게 아니다. 글쓰기는 반복되겠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이고, 근사치에 다다를 뿐 완전한 종결은 없을 것이다. 다만 과정이 남는다.


"10년은 누군가가 경험한 것의 의미가 변하지 않고, 수치스러운 채로 남아 있는 수없이 많은 나날과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 그것은 여전히 개별적이고 성적인 하나의 사건이고, 그로 인해 느꼈던 수치심은 새로운 세기의 신념 속으로 녹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139면)"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그것은 여전히 개별적인 사건이고 그로 인해 느낀 수치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니 에르노는 그 사건 자체에 대한 수치심뿐만 아니라 사건에 대한 과거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도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중의 수치가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식의 축적에 따라, 변화하는 세상에 따라,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도 바뀌어 간다. 시시각각 수치스러움의 색이 결을 조금씩 달리해가며, 짙어진다.


그녀는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수치심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남아 영향을 미치는지, 세월 사이사이 인생의 관측소에서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도 끈을 놓지 않고 서술한다. 그 사건이 관통한 삶을 보여준다.


캠프에서의 밤 이래 일어난 모든 일들이, 추락에서 추락으로 이어져,

이 최초의 글쓰기로 귀결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것은 글쓰기라는 안식처에 다다르기까지의 위태로운 횡단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결국 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라는 깨달음을 증명하는 이야기.(202)


나는 위에 인용한 문장을 읽다가 짙은 새벽에 홀로 눈물을 쏟았다. 그녀가 통과해 온 모든 세월과 저 문장, 죽을 것 같은 수치심과 죽을 것 같은 글쓰기가 무력함에 그치지 않고, 다른 '힘'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에. 그녀가 '책을 다 쓰고 나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106면)'라고 말한 게 어떤 의미인지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정말 뼛속까지 내려가, 몇 번이나 죽었을 자신의 관속까지 내려가 썼다.

  

절망을 느끼던 그 시기에 이 여성들이 - 당시에 나는 그들의 이름조차 몰랐지만 - 자기처럼 버려진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위로하고, 같은 시기에 거의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이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것이 지닌 고유성과 고독을 산산조각 내러 상상력이 찾아올 때 느끼는 이 회고적 위안의 기이한 달콤함.(127면)


나는 어떤 여자가 50년도 더 되었고 자신의 기억으로 뭔가 새로운 걸 덧칠할 수도 없는 오래된 장면들을 회상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 수많은 명사와 동사, 형용사들 중에서 현실에 가능한 한 가장 가까이 도달했다는 확신 - 허상- 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찾으려는 이 집요함 속에 있는 - 이해하고자 하는 것을 초월하는 - 이 욕망은 대체 어떤 욕망일까? 이 여자아이, 아니 D와 다른 누군가 사이에 적어도 단 한 방울이라도 닮은 구석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하고 싶다는 희망이 아니라면(134면)


나는 나만의 고유성을 찾고자 노력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소설을 읽으면서는 '나만 그런 거 아니야'라는 증거를 집요하게 수집한다. 나만 이렇게 못돼 처먹은 게 아니야, 나만 이렇게 실수에 엉망진창인 인간인 게 아니야, 나만 이렇게 교묘하게 못난 게 아니야, 나만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을 겪은 게 아니야, 나만 이렇게 그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당당했던 게 아니야...


그녀는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가지고 글을 썼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회고적 위안의 기이한 달콤함을, 단 한 방울이라도 닮은 구석이 존재하는 이제 막 마흔이 된 나에게 안겨준다. 분명히 쓰지만 확실하게 달콤한 다크 초콜릿 같은. 다만 달콤함을 위해서는 감수해야 한다, 그 다크함을. 가차 없고 자기 연민이 끼어들 틈 없이 벗겨지는. 읽다 보면 그런 생각도 든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것은 뭔가 다른가. 오로지 쓴 사람만이 알겠지. (*자기 연민 없음, 여자아이의 기억과 모녀관계에 대한 내용은 언젠가 따로 작성해야지 싶다. 더 읽어봐야 하는)


이 책은 소설가 백수린이 번역했다. 좋아하는 작가다. 단편 '고요한 사건'을 읽고부터다. 덕후력이 없는 탓에 좋아한다고 해서 뭐 그의 작품이라면 다 읽고 세세하게 뭐든지 알고 그런 건 아니다. 꼭 다 알아야만 겨우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긴 시간 책을 가까이 해왔지만 콕 집어서 좋아하는 작가가 있진 않았던 내게는 작은 일이 아니다.


<여자아이 기억>을 읽으며 그녀에게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아니 에르노와 백수린의 조합으로 말로 못 다할 서늘한 생생함이 덮쳐와 읽는 내내 몸의 피가 마르는 듯했기 때문이다. 소설가로서의 고유한 능력이 더해지니 조금도 거리두기가 불가능했다. 몰입 외엔 속수무책. 그녀는 옮긴이의 말에서 '강요된 타자의 법칙 앞에 압도되어 자신을 상실해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주체가 되기 위해 분투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여자아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216면)'이라 말한다.


이 문장에 대해서 여러 번 생각하고 곱씹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나 une fille, elle의 이야기 아닌가라는 생각과, 어떤 경우에는 어떤 elle보다 어떤 il이 이 여자아이에게서 더욱 자신과 닮은 구석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 책을 읽은 누군가들의 얘기가 궁금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해소되지 않은 개별적인 사건을, 생을 걸고 이해해 보려는 필사적인 시도, 그 과정 자체에 함께 투신하여 추체험하는 것. 그런 시도를 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추천할만한. 그렇지만 나처럼 약한 비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주의해야 할 것. 아 타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 그럼에도, 기이한 일이지만 그 끝에는 분명 기다리고 있다, 위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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