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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조이 Dec 07. 2021

미술하는 마음들이 모여

<미술하는 마음>을 읽고



나이 서른이 되어 '부끄러운 것들의 목록' 중 하나가 내 가까이에 예술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미술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만드는 사람들 뿐 아니라 미술업계 종사자, 미술을 말하거나 쓰는 사람, 미술 애호가조차도 주변에 없었다. 


이 사실이 세상에 부끄럽더라. 대체 나란 사람, 어떤 이였기에 주변에 미술하는 사람 하나 없을까.


전시회에서 작가노트를 읽고 작품을 감상할 때, 내가 단 한 명이라도 미술인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전시를 좀더 이해할 수 있을텐데. 지금 내 앞의 이 작품을 그린 작가의 심정을 적게나마 헤아려 볼텐데. 서러움까지는 아니었지만 묘하게 씁쓸했다. 


그러다 만난 책이 제철소 출판사가 론칭한 직업 인터뷰집 시리즈 '일하는 마음' 중 <미술하는 마음>이다. 미술업계는 예술로 사는 이들의 우아하고 지성미 넘치는 곳 아닐까, 어렴풋한 나의 생각에 험난한 미술업계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전해준 책. 인터뷰집이라서 그런지 미술업계 정보 자체보다, 저자의 말과 인터뷰이들의 대화체가 마음에 고스란히 남는다.  







 

현시원, 공간 운영자의 마음


미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간을 소유한다는 건 꿈같은 일이다. 물리적 장소 그 이상의 의미다. 프리랜서 성격이 강한 작가와 독립 기획자에게 공간은 작업에 대한 스펙트럼을 꾸준히 확장시켜나갈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한다.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게 다반사인 미술꼐에서 계속해서 제 일을 하겠다는 무언의 의지인 셈이다. 25쪽.

공간을 작가들의 작업을 담는 그릇이라고 치면, 그 그릇과 내용물이 어떤 모습으로 미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묵묵히 그 그릇 안에 무엇을, 어떻게 담을지 고민하며 보낸 지난 시간을 돌이켜봤을 때, 단연코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현시원은 말한다. 41쪽.


김해주, 큐레이터의 마음


미술계에서 큐레이터는 전시를 기획해 관객에게 작품을 선보이는 업무를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인 동시에 작품과 참여 인력을 '돌보는 사람', 즉 소통하고 매개하는 사람을 뜻한다. 소속 기관에 따라 전시기획자, 학예연구사로 불리기도 한다. 49쪽.

"... 머릿속의 생각이나 상상도 글로 써야 비로소 정리가 되는 느낌이에요. 모호한 상태가 언어로 구체화되면서 전시를 위한 소통에 필요한 어휘들이 갖춰지는 것 같아요...." 51쪽. 

"새로운 전시에 대한 생각은 보통 이전 전시로부터 파생되는 것 같아요. 전시를 하면서 떠오르는 것, 혹은 남겨진 질문이 다음 전시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흐름이 있어요...." 56쪽.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곳에서 '돌봄의 태도'를 갖췄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동한다. 전시를 함께 만들어가는 이들이 다 같이 최선과 최상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돌봄'의 관계 속에서 신뢰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전시는 대개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63쪽.


이제, 작가의 마음


그릴 수밖에 업섹 만드는 동력,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평범한 일상의 틈에 존재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87쪽. 

"작품활동 초기엔 예술가는 특별한 상황들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좀 달라요. (중략) 작가로서의 정체성도 사실은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늘 완성돼 있었던 거예요. 그것을 순간순간 발견할 뿐이고요...." 89쪽.

그는 '잘 아는 것을 성실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게 아름다움에 일조하는 일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중략) 확실히 그림은 몸으로 하는 일이다. 물감이라는 물성을 활용해서 육체의 감각을 캔버스로 옮기는 일. 작가의 이야기는 몸을 통해 '번역'되어, '생생하게 고정된' 이미지를 획득한다. 102쪽.



이수성, 공간 디자이너의 마음


전시공간 디자인은 벽을 만들거나 도색을 하는 등의 물리적인 공간 조성에만 그치지 않고 작품과 전시의 맥락을 이해하는 미술적 감각이 필요한 일이라 전시공간 디자이너의 역할이 갈수록 중시되고 있다. 112쪽.

구조물의 형태를 날렵하게 만들거나, 약간 위태하게 설치하면 눈에 띄는 '예쁜 구조물'을 만들 수 있다. 긴장감이 살아 있는 외곽선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전과 디자인의 갈림길에 놓일 때면 이수성은 언제나 안전을 선택한다. 122쪽.


이한범, 미술 편집자의 마음


대부분 전시 관련 원고는 편집자에게 모이기 때문에 전시 홍보 자료, 전시장 벽면 소개글, 작품 캡션 등의 텍스트도 별도로 추려서 보내달라는 부탁도 받게 된다. 이런저런 뒷작업까지 고스란히 편집자의 몫이 되는 것이다. 177쪽.

"미술출판에서 편집자의 역할이 딱 정해진 건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기가 주로 다루는 책, 추구하는 출판의 방향, 그리고 어떤 주제의 출판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위치 설정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178쪽. 


김정현, 미술 평론가의 마음


예술이론사나 미학을 공부하는 일이 적성에 잘 맞았다. 그림 그 자체보다는 그림에 관한 글을 읽는 것이 좋았다. 194쪽.

지금은 평론가로서 무엇이 더 필요할지 생각하게 됐다. 중요한 건 단연코 작품을 보는 안목이다. 어떤 타이틀로 주어지는 게 아닌 직접 발로 뛰고 보고 느껴서 얻어내야 비로소 걸러지는 감각. 하지만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곰곰이 생각할 시간과 생각한 것들을 글로 다 풀어낼 때까지 붙들어줄 무거운 엉덩이가 필요하다. 199쪽.


김종환, 도슨트의 마음


도슨트는 주로 미술과 전시에 관심 있는 일반인을 자원 봉사나 재능기부의 형태로 모집한다. 비전문인이라는 이유로 미술계에서 소외받기 일쑤였던 도슨트. 218쪽.

도슨트의 책무는 기획자와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죠. 하지만 거기에 추가적으로 도슨트 본인의 경험과 지식이 보태진다면 분명 내용이 한층 더 풍부해질 거라고 봐요. 228쪽.


조자현, 회화 보존 전문가의 마음


"그림 구조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림은 평면이고, 보이는 표면도 물감이나 바니시 정도잖아요. 그런데 회화 보존가들이 작품을 볼 때는 작품 구조를 아래서부터 관찰해요. 레이어층을 보는 거죠.... " 245쪽.

복원 작업은 대상 분야마다 물성이 달라 쓰이는 도구도 각기 다르다. 상대적으로 세밀한 기술을 요하는 회화작업의 경우 그 도구가 작고 예리하다. 247쪽.

"처리를 시작하기 전에 상태부터 조사하거든요. 사진 찍고. 작가가 살아 있으면 설문조사도 해요. 어떤 재료, 어떤 캔버스를 썼는지 조사하는 거죠...." 259쪽. 


 



마치 직업처럼 미술관과 갤러리에 들어가 전시회를 감상하는 미술 애호가로서 이 책은 꼭 선물처럼 느껴진다. 관객 한 사람에게 작가의 작품이 닿기까지. 그야말로 수많은 이들의 기획과 협업, 기술과 배려, 희망과 낙담, 경험과 감각 등의 결과물이 전시라는 형태로 세상에 나와야만 관객들의 '감상'이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고 또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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