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NER SPARK Dec 23. 2023

다 주지 마라. 상상하게 하라.


수도권 검찰청에 근무할 때 옆방 선배검사로부터 잘 배운 게 하나 있다. 변호사와 사업가로 직업을 바꾼 뒤에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 검찰청 옆집인 법원은 검찰이 청구한 각종 영장을 거의 기각했다.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른다. 구속영장, 체포영장, 압수영장 등을 대부분 기각했다. 특별수사할 때 필요한 금융계좌 추적영장까지 아주 제한적으로 발부해 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특별수사 전담인 옆방 선배검사님은 거의 100% 각종 영장들을 받아 내고 있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너무 궁금해서 선배님한테 그 비결을 물어봤다. 그 선배는 말 대신 웃으면서 사건기록을 몇 개 던져주면서 그 이유를 찾아보라고 했다. 나는 한참 그 기록들을 뒤져봤는데, 기록이 꼼꼼하게 만들어진 점 외에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그 이유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저녁 먹고 있을 때 선배가 옆으로 왔다. 나는 그 선배가 좀 얄미웠다. 그냥 좀 알려주면 어때서. 그래서 "선배님, 좀 힌트라도 주면 안 됩니까?"라고 물었다. 선배는 다시 웃으면서 "알았어. '수사보고서' 위주로 봐."라고 말해줬다. 


저녁 먹고 나서 나는 다시 선배방으로 들어가 그 기록들을 다시 넘겨봤다. '수사보고서' 위주로. [수사보고서는 수사의 여러 상황을 비교적 자유스럽게 정리한 것이다. 사람의 진술을 적은 조서와 다르다.]


그 수사보고서들을 보는데, 좀 갸우뚱했다. 지금까지 수집한 증거와 수사의 여러 상황을 정리를 하는데, 사실만 간략히 기재해 놨다. 한마디로 팩트위주로 쓰고 그 팩트들에 대한 평가가 없다. 이런저런 증거들을 풀어 설시 했을 뿐 그 증거들로부터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나 평가가 빠져있다. 


혐의자가 어떤 행위를 한 것만 쓰고, 그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압수수색이 꼭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 등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기재돼 있다. 확실히 다른 검사들이 작성한 것과 다르다. 아니 부실하다! 이런 부실한 사건기록으로 그동안 그렇게 많은 영장들을 받아 냈다니. 그 이유가 뭘까?


선배에게 내 생각을 얘기했더니, 선배가 껄껄 웃으면서 "정답을 60%는 맞췄구먼. 수사보고서를 왜 그렇게 작성했을까?" 나는 차마 부실하다는 말은 못 하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저런 기록으로 영장이 잘 나오는 게 신기합니다."라고 말했다. 


선배는 차 한잔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한다. "다 주면 안 돼. 판사들도 다 자기들 생각이 있는데 우리 검사들 생각을 강요하면 안 돼." 나는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선배가 말을 이어간다. "나는 증거 모은 것과 팩트만 판사한테 주면 돼. 상상은 판사가 하면 되는 거지. 판사도 사람이고 판단하는 위치에 있잖아. 그런 사람한테는 팩트만 주면 상상력을 발휘해서 알아서 '영장이 필요하겠구먼'이라고 생각을 하거든. 그러면 영장이 쉽게 나오지."


나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렇다. 검사는 "~~ 때문에 ~~ 하여서 영장이 꼭 필요하다."라고 구구절절 설명을 많이 한다. 설득하려고 한다. 검사 자신의 그림을 아주 세세하게 사건 기록에 그려 준다. 그걸 보는 판사는 '난 생각이 달라'라고 영장을 기각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증거들로 팩트만 나열해 놓으면 판사가 알아서 사건을 상상한다. 검사가 보는 것보다 혐의자를 더 나쁘게 볼 수 있다. 그 선배가 달라 보였다. 


맞다. 왜 자꾸 내가 만든 패러다임에 상대방을 억지로 욱여넣을 생각을 했을까? 그 사람이 알아서 자유롭게 상상하게 하면 되는 것을. 나는 그 이후로 수사보고서를 작성할 때 그 선배의 방식을 따라 했다. 신기하게도 영장발부되는 확률이 크게 올라갔다. 


변호사 할 때도 너무 욕심내서 많은 것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의뢰인의 안타까운 상황을 판사가 알아서 상상하도록 적당히 적는다. 그러면 의외의 좋은 결과들이 많이 나온다. 


스타트업을 하는데도 마찬가지다. 스타트업에 필요한 투자금을 받을 때 프레젠테이션도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나는 통계자료, 설명자료는 자세히 제시하고, 투자했을 때 성장가능성 등에 대한 비전관련된 부분은 간략하게 적는다. 그 사람들은 그냥 한 번 딱 보면 '이 회사가 될 회사인지 안 될 회사인지' 안다. 굳이 회사 미래가치에 대해서 내 패러다임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투자자는 회사상황에 대한 이런저런 자료를 보고, 회사대표와 그 구성원을 보고 종합적이고도 직감적으로 판단한다. 투자자들이 우리 설명자료를 보고 우리 회사의 미래를 더 웅장하게 상상할 수도 있다. 내가 1년에 5배 성장을 생각하고 있는데, 투자자는 100배의 성장을 상상하고 있을 수 있다. 그저 투자자의 상상력만 자극하면 된다. 


내가 비행기 시간에 늦어 헐레벌떡 탑승구로 달려왔다. 그런데 탑승구는 이미 닫혔고,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그 순간 나와 조종사의 눈이 마주친다. 나는 온 세상을 잃은 슬픈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털썩' 떨어뜨린다. 그 모습을 본 조종사가 잠시 생각을 하고 부조종사와 얘기를 나누더니 다시 비행기를 탑승통로 쪽으로 돌려 붙인다. 나는 다 놓쳤던 비행기를 타게 된다. [설득심리학에 관한 어떤 책에 있는 사례]


내 행동에 조종사는 여러 상황을 상상했을 것이다. '저 사람이 이 비행기를 못 타면 일생일대 큰일이 발생하나 보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자.' 나는  손짓발짓으로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표정과 가방을 떨어뜨리는 그 행동만으로 내 목적을 달성했다. 


상대방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행위만으로 목적달성이 가능하다. 너무 많은 것들을 상대에게 주려고 하지 말자. 구구절절 설득하려고 하지 말자. 너무 힘이 들어간 모습만 들키게 된다. 모래는 힘주어 세게 쥐면 빠져나가 버린다. 좀 허술하게 보여도, 허술한 그 틈으로 운이 들어온다.


내가 원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상대가 주길 원해야 그것을 받을 수 있다. 그게 우주원리다. 



눈풍경(그림판그림) by INNER SPARK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