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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 Aug 17. 2024

영화 《천년여우》 리뷰

삶과 사랑의 의미

 얼마 전에 《지킬의 영화 비평》이라는 책을 보며 흥미롭게 와닿은 구절이 있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끌고 들어와 공포 장르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은 해석이 거부되는 존재고 꿈의 목적은 꿈을 꾸는 동안의 감정 분출이 무의식에 억압된 소망 충족(욕망의 분출)을 이루어주기 위함이다. 욕망은 때로 현실 세계에서 이룰 수 없거나 이뤄서는 안 될 금기일 수 있기에 꿈은 의식적 자아의 검열을 피하려 한다. 이때보다 더 복잡한 상징과 층위로 생성된 난해한 불안몽(악몽)일수록 억제된 리비도(성본능)가 더 센 강도로 분출되고 정확한 꿈의 내용 대신 강렬한 정서적 리듬만을 남기며 소망 충족을 이뤄냈다고 그는 분석한다."(pg. 119~120)
 마침 얼마 전에 본 영화가 곤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였다. 공포 장르라고 할 수는 없지만《멀홀랜드 드라이브》나 《지구 최후의 밤》, 혹은 같은 감독의 영화 《파프리카》처럼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주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영화였기에 "난해한 불안몽"이라는 글을 읽고 최근에 보았던 그 영화가 안 떠오를 수가 없었다.
 플롯이 모호하고 심지어는 내용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보고 있으면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주는 영화들이 더러 있다. 앞서 말한《지구 최후의 밤》, 《M》,  혹은 데이비드 린치나 곤 사토시 감독의 영화들. 프로이트가 꿈을 분석한 내용처럼, 이런 영화들을 볼 때 어쩌면 중요한 것은 영화의 내용 대신 무의식에서 해석된 의미를 통해 느껴지는(그 해석은 감독이 의도한 해석이 아닐지도 모른다) 감정적 카타르시스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깨어있는 채로 꾸는 백일몽이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천년여우》를 볼 때 가장 감정이 동요한 씬이 무엇이었을까? 우선 여배우 치요코가 "그 남자"의 발자취를 끊임없이 좇고 쫓지만 항상 어긋나는데, 반복되는 그 상황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에서 그를 놓쳤을 때의 씬. 그를 놓쳤을 때의 안타까움과 허무감, 공허함을 극대화시킨 씬이 바로 그 장면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 느껴졌던 공허감을 카타르시스의 에너지로 전환시킨 장면이 바로 마지막 씬이 아닐까 싶다.
"이번엔 분명 그분을 만나시겠네요."
"글쎄, 어떨까요? 만나든 말든 상관없는지도 몰라요. 왜냐면 난 그 사람을 좇는 내 모습이 좋거든요."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시시포스의 신화를 다들 한 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내용인즉슨, 시시포스가 제우스로부터 형벌을 받게 되는데 그 형벌은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것. 그리고 산꼭대기에 이르면 바위가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형벌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이야기이다. 영화 속 여배우 치요코도 요괴로부터 비슷한 저주를 받게 된다. 요괴가 건네준 사약을 마시게 된 그녀는 "천년을 살며 영겁에 걸쳐 사랑에 불타게 될 운명"이 되어버린다. 시시포스처럼 그녀 또한 영원히 목표가 목표가 아닌 무망한 굴레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는 곧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도 연결이 된다. 모든 존재와 에너지가 반복되어 왔으며, 무한한 시간을 가로질러 무한한 횟수로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바로 그 개념. (마치 멀티버스처럼 수많은 형태의 영화로 "그 남자"를 뒤쫓던 치요코가 떠오르지 않는가?) 니체가 이 영원회귀적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자 삶의 목표로 제시한 개념은 바로 초인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긍정할 줄 알아서 고통마저도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기회로 받아들이며, 외부의 힘이나 절대자에게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삶에 집중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해 내는 자. 이 초인은 니체의 저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사람의 세 가지 단계인 낙타, 사자, 어린이 중 어린이의 단계에 해당한다. 어린이의 단계에 이르러서 사람은 삶을 놀이로 파악하고 그것을 즐기게 된다. 끊임없는 놀이를 통해 질리지 않고 긍정하며 자신만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 즉, 결과나 목표에 연연하지 않고 그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고 즐기게 되는 것이다.
 다시 《천년여우》로 돌아와서, 치요코를 통해 느꼈던 일종의 카타르시스는, 자칫 무망해 보일 수 있는 삶(사랑)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느낀 감정적 해방감일지도 모르겠다. 삶에 절대적인 의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도 삶과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는 숱한 문학 작품에서 접해왔다. 어린 왕자의 장미 이야기라든지,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말이다. 삶과 존재의 의미를 찾는답시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면 그야말로 엔트로피 그 자체로 모든 것은 결국 의미가 없어진다. 광활한 우주에서는 모든 존재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이 큰 힘을 지니는 것이다.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해 주며 존재의 가치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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