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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랑켄슈타인》 리뷰

순환적 부자 관계

by 이니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다양한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덧 영문학상 정전의 위치에 오른 작품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이 《프랑켄슈타인》을 본인만의 스타일로 재탄생시켜 후속작으로 들고 왔다. 《프랑켄슈타인》은 앞서 말했듯 다양한 텍스트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가부장제의 억압, 부자 관계, 계급관계, 심지어는 프랑스혁명까지. “진정한 괴물이란 무엇인가?” 와 같이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도 있다. (고로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 연상되는 화두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그중에서도 부자 관계에 초점을 두고 영화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프랑켄슈타인》 영화들을 살펴보면, 괴물은 말 그대로 추악한 괴물로 나오거나 [《프랑켄슈타인의 저주》(The curse of Frankenstein, 1974)] 영웅적인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어찌 보면 수직적인 부자 관계에 처한 아들로 묘사된다 [《프랑켄슈타인》(Mary Shelley's Frankenstein, 1995)]. 전자의 영화 관객들은 괴물을 그저 엽기적 볼거리로 소비하게 되고, 후자의 영화 관객들은 괴물을 동정적 시선으로 보며 프랑켄슈타인을 완벽한 영웅으로서 정당화하게 된다. 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은 사뭇 다르다.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유사 부자 관계이며 순환적인 관계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네가 나를 창조했지만, 이제는 내가 너의 주인이다. 복종해!"라고 말하는 씬. 혹은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에게 "내 이름을 불러다오. 아버지가 주신 이름이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지. 네가 그 이름을 돌려주겠니?"라고 말하는 씬을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장님 할아버지와 괴물이 대화를 나누는 씬에서 언급이 되었듯, 창조자를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한 존재로 그려내지 않고 그 또한 부족하고 미숙한 점이 있는 존재로 그려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은 신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신조차 질문을 품고 계시지. 신도 답을 원했기에 우리에게 아들을 보내신 게 아닐까? 죽음이 궁금하셨을 거야, 고통도. ") 결국 신도, 아버지도 자신의 창조물을 사랑했지만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선한 의도와는 달리 서로 상처를 입히고, 받는다. 창조물이자 아들이었던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듦으로써 창조자이자 아버지가 된다. 창조자와 창조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순환되며 상호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프랑켄슈타인은 아버지의 입장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존의 과오를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되며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본인을 긍정하게 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순환적 이미지는 장님 할아버지가 괴물에게 들고 오라고 한 책, 존 밀턴의《실낙원》의 테마와도 이어진다. 《실낙원》에서 악마인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는 결국 낙원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는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들의 타락은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불완전한 인간이 성장하게 되는 출발점과 이어져있다. 이렇듯 순환적이고 상호적인 방향성은 영화에서 중요하게 나타난다.
극 중,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든 후 지평선이 사라진 느낌으로 공허함만이 찾아왔다고 고백한다. ("빚어가는 건 내 몫이었는데 창조 이후는 생각도 안 해 봤던 겁니다. 그렇게 땅끝에 다다르자 지평선도 사라졌달까요? 그 성취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고 공허함만 남더군요.") 하지만 엔딩 씬에 이으러 그들의 미래는 본인들이 탄 배의 이름과 같이 ("horizont") 아름다운 수평선(horizon)이 맞이하고 있다. 그렇게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미래에 대한 희망, 가능성을 열어둔 채 마무리된다. 비록 그들은 타락했지만, 이는 곧 성장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이상 부자 관계를 용서와 반성을 담아 아름답고도 강렬한 미장센으로 빚어낸 영화,《프랑켄슈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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