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엘릿 Aug 11. 2022

너무나도 보편적이어서 더욱 치명적인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보고...

나는 러시아 문학을 잘 알지 못한다. 최근에서야 안톤 체호프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최근에 뭔가 영화를 보고 싶으면 시얼샤 로넌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던 시기가 있었다. 대략 작년 초에 시얼샤 로넌이 출연한 <갈매기>라는 작품을 보게 되었다. 작품에 대한 별다른 정보 없이 보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다 보고 나서 이 영화에 엄청나게 사로잡혔다. 당시에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감명을 받았는지 설명할 수도 없었다. 영화를 본 이후에 알아보니 이 영화는 안톤 체호프라는 러시아의 가장 유명한 희곡 작가의 대표작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 고전 문학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연기 전공자들에게는 필수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작품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 출연한 연기자들도 이 작품을 만든다고 했을 때, 빠르게 작품에 몰입하여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촬영을 끝냈다고 한다(정확한 촬영 기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후에도 이 영화를 두 번 정도 더 보았고, 올해 초(2022년)에는 이 희곡이 담긴 책도 사서 읽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해가며 읽고 싶어서, <갈매기> 외에 3 편의 희곡이 포함된 안톤 체호프의 희곡집을 샀는데, 아직 <갈매기> 밖에 읽지 못했다. 나머지 세 개의 작품은 아껴서 읽어야지(후후).


이 작품은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 학생들에 의해서 많이 토론되고 분석되어 온 작품이기 때문에 내가 이 작품을 보고 느낀 점을 적어보았자 매우 얕은 소견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이 작품을 통해서 느낀 점을 나의 일기처럼 글로 남기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내 삶에 빗대어서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래부터는 스포가 가득하므로 스포일러가 싫으신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나는 이 작품이 대단하다고 느낀 것이 이러한 점에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들을 가진 사람들이고, 이들이 가진 욕망도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각 인물들의 모습에서 나와 닮은 모습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감정들이 서로 만나서 파괴적인 충돌과 폭발을 일으킨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우선 시얼샤 로넌이 맡았던 '니나'는 배우 지망생이다. 니나는 콘스탄틴의 어머니 이리나가 배우인 것 때문에 매력을 느끼고 콘스탄틴과 연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니나는 이리나와 보리스가 나타나자 콘스탄틴은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니나는 호수가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해서 배우가 되어 명예를 얻고 싶어 한다. 그런 그에게 나타난 성공한 배우와 작가인 이리나와 보리스는 니나에게 배우로서의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처럼 보인다.


자신이 가보고 싶었던 그 어떤 미지의 세계나 장소에서 온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건 너무나도 보편적인 감정이다. 니나가 보리스에게 끌리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내어주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기보다는 자신이 동경하는 세계가 아직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자신을 그곳에 던져버리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결정과 행동을 하였지만, 그런 니나가 너무나도 이해되고 어떤 심정인지 잘 알겠어서 비난할 수가 없다.


그런데 니나는 정말 연극과 연기를 사랑한 것일까? 나는 여기서 동경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했다. 니나는 연극의 세계와 보리스와 이리나를 동경했고, 결국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배우가 되었고 보리스의 마음도 얻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유명한 배우는 되지 못했고, 보리스의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는 죽었으며 보리스도 결국 니나를 완전히 떠났다. 니나는 스스로를 그 '갈매기'와 같다고 말했다. 그 갈매기는 콘스탄틴의 총에 맞아 죽은 갈매기를 말한다. 좋아 보이고 화려한 것을 쫓다가 사람이 망가졌다. 행복해 보이는 길을 간다고 해서 곧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불행으로 가는 길은 입구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콘스탄틴은 니나의 연인이고, 이리나의 아들이며 작가 지망생이다. 이리나의 오빠인 소린(삼촌)의 저택에 함께 머물고 있다. 삼촌이 위독하다는 소식 때문에 어머니 이리나가 돌아왔다. 이리나는 연인인 보리스와 함께 왔다. 보리스는 성공한 단편 작가이다. 이들의 방문을 기념할 겸 해서 콘스탄틴은 자신이 쓴 연극을 공연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자신이 사랑하는 엄마 이리나와 연인 니나에게 모두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지 못해 좌절한다. 공연이 중단된 콘스탄틴의 작품에 유일하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를 사랑하는 마샤뿐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마샤에게는 관심이 없다. 콘스탄틴은 이리나와 니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서 힘겨워한다. 그런데 이리나와 니나 모두의 인정과 애정을 받는 대상이 있다. 바로 보리스다. 콘스탄틴은 보리스에 대한 질투심에 불타올라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한 갈매기를 총으로 쏴서 죽이고, 자신이 그 갈매기처럼 될 거라고, 혹은 자신이 그 갈매기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콘스탄틴이 보리스에 대한 질투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한다. 그러나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힘들어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콘스탄틴이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이유에는 그의 어머니 이리나의 영향이 클 것이다. 이리나는 철없는 엄마의 전형이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을 텐데, 그러한 욕구들을 하나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콘스탄틴의 작품을 무시하고, 어머니가 배우면 작가가 되고 싶은 아들에게 여러 가지 성숙한 조언이나 격려를 해 줄 수도 있을 텐데 작가로서의 아들의 작품을 조금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따뜻한 격려나 조언을 해주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토록 인정받고 싶은 어머니의 옆에는 성공한 작가 보리스가 있다. 나 같아도 미쳐서 돌아가실 것만 같다. 콘스탄틴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마음이 단단하게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작가로서 부딪히는 어려움들을 성숙하게 이겨내기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작가로서 가장 인정받고 싶은 대상은 어머니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힘들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리나가 붕대를 감은 콘스탄틴에게 붕대를 갈아주며 눈을 맞추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때의 콘스탄틴의 눈빛은 잠시였지만 정말 반짝반짝 채워진 느낌이었다. 그동안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시간마저 충분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런 콤플렉스가 없어서 생각을 못해봤는데,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니 이렇게 콘스탄틴과 비슷한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았다. 자신의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서 그 부분이 자신의 빨간 버튼인 사람들 말이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있거나, 세상 그 누구보다도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평생을 애써 온 사람들이 있더라. 부모님에게 "참 잘했다." 혹은 "수고했다." 그 한 마디 듣고 싶었으나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콘스탄틴의 이런 좌절을 너무나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리나는 여자 배우이다. 유명한 배우이고, 명성도 얻었지만, 이러한 명성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하다. 그녀에게 모성애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리나에게는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신이 사랑받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람이다. 아들보다는 보리스라는 자신의 연인에게 잘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항상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은 나이에 비해 늙지 않았고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자부심이다. 이리나는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다. 엄마의 역할 때문에 자신의 커리어를 버리지 않았고, 여성으로서 사랑받는 삶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여성상은 지금 현실에도 많이 보기 힘든 매우 현대적인 캐릭터이다. 많은 경우 남편이 없는 여성들은 아들에게 집착하고 아들을 남편의 대리로 생각하며 이후 이는 고부간의 갈등을 만드는 등 가족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경우는 한국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D.H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이라는 작품에서도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다룬다. 남편과의 단순 육체적인 관계에 만족하지 못한 모렐 부인이 아들을 정신적인 연인으로 삼고, 이러한 지나친 사랑은 장남을 요절하게 만든다. 이후 둘째 아들에게 옮겨간 그 애정은 둘째 아들의 삶마저 망가뜨려 버린다.


보통 엄마가 된 여성의 삶은 모성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성애를 강요받기도 한다. 모성애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성애가 지나치는 것이 더 흔한 현상이지만, 이리나는 그 반대의 인물이므로 페미니즘이 유행하는 지금 시대에 더 주목받을만한 캐릭터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작품은 예술가에 대한 고찰을 다루기도 한다. 보리스는 성공한 작가이지만, 자신은 그 명성을 딱히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그 명성이란 게 먹어 보지 못한 마멀레이드 맛과 같다고 한 걸 보면, 명성을 얻더라도 그 맛을 보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또한 자신은 무엇이든 "써야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다. 안톤 체호프는 자신이 작가로서 느끼는 심정이나 고민들을 보리스라는 인물을 통해서 풀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잘 써도 톨스토이 같은 역대급 작가와 비교당한다거나, 죽어서도 그러한 비교에 시달린다는 대목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또한 예술 작품에 대한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갈등 또한 다루고 있다. 콘스탄틴이 추구하는 작품 세계는 이리나와 보리스의 세계관과 매우 다르다. 그리고 콘스탄틴의 주장에 따르면 예술계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젊은이들의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며 비하하거나 밀어내고 있다고 했다. 기성세대들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의 세대갈등은 예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세계관의 예술가들은 개척자로서 힘든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콘스탄틴은 작가로서 더욱 좌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젊은 여자와 나이 든 여자,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가 등장하여 네 명 사이에 벌어지는 교묘한 감정들과 이러한 사소한 감정들이 부딪혀서 생기는 엄청난 스파크 등을 잘 그려내었다. 나이가 들었지만 결코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이를 먹었다고 저절로 성숙해질 리가 없다. 직업적으로 성공했다고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행복해 보인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갈매기는 날아다니는 평범한 새일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것이  어떤 사람에게 우연히 걸리기보다는 온전히 자기 자신의 힘으로 멀리 날아가기를 꿈꾸는 내가   있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프라임 세포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