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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Oct 13. 2024

난생처음 38점을 맞았다.

뭐라? 38점이라고?


38점. 믿을 수 없지만 현실이었다.

<마법천자문> 1권 불어라 바람 풍의 기세가 덮친 듯 나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으며

아직 반이나 남은 6000원짜리 아메리카노에 초파리가 빠졌을 때처럼 황당무계했다.

정말이지 38점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점수였다.

나는 오늘 난생처음 맞아보는 38점에 대한 에세이를 쓰려한다.

다만 늘 나의 두 딸들을 늘 걱정해 주시는 구독자들이 계시므로 38점이 둘째 딸 수학점수는 아님을 미리 밝힌다. 만일 딸의 수학 점수가 38점이었다면, 나는 지금쯤 포도송이가 아니라, 포도주로 필명을 바꿨을지도 모른다.




나는 최근 카카오에 큰 배신을 때렸다. 5년간 사용한 카카오 네비를 티맵으로 갈아탔다.

배신의 이유는 명료했다. 자동차 보험료 할인! 무려 최대 19.3% 할인이라니, 꽤 큰 금액이다. 안 갈아탈 이유가 없었다.


티맵 운전 점수가 76점 이상이면 보험료 할인 요건에 충족했으므로

나는 자신 있었다.  태어나 딱 한 번 우회전 신호를 어긴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내 차 뒤통수를 카메라에 담은 모양이다. 어쨌거나 야박한 카메라맨 덕분에 생애 첫 딱지는 우회전 신호 위반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76점은 그냥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만 잘 들어도 기본으로 받을 수 있는 모범생들의 점수라는 얘기다. 다만 6개월 500km 이상, 누적 주행거리 3000km 운전자만 인정한다고 하니, 6개월 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주 목적지는 나의 직장 OO 도서관.

매일 왕복 30km를 주행하니, 출퇴근 주행만 100번만 하면 된다.


아침 출근길 시동을 켠다. 네비에 목적지를 등록한다.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 주파수를 확인한다. 거리의 가로수가 제법 가을빛을 낸다. 기분 좋은 길을 달린다. 단골 주유소를 지나는데 휘발유 1590원. 어제보다 30원은 내린 같다.

신호에 걸렸다. 젊은 할머니가 어린이집 육복을 입은 손녀딸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잠시 나의 엄마, 어린 손녀딸을 보시던 젊은 할머니 시절을 회상한다. 그때 엄마는 젊고 건강했다.  호가 바뀐다. 다 달리기 시작한다.  차선에 집중한다. 곧 차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다음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도착! 네비 종료.

내가 생각하는 나의 운전은 오늘도 완벽했다.

보험료 할인을 받기 위해서 매일 네비가 필요 없는 길을  네비를 켜고 달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티맵에 알림이 떴다.

'어제 운전으로 운전점수가 올랐어요'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시험을  딸에게서 온 전화의 진동벨 같았다.

몇 점일까. 몇 개나 틀렸을까, 시험은 쉬웠나, 어려웠나

딱 그 심정이었다.

100점? 98점? 아무리 짜게 줘도 90점은 넘겠지? 고럼고럼

티맵으로 들어가 드디어 나의 운전 점수를 확인했다.


운전점수 38점


83점도 아니고, 38점이라니... 백분율 상위 90%. 10명 중 9등이라는 소리다.

티맵 어디 고장 난 거 아냐?

이거 내 점수 아닌거 아냐?

곧 운전이력 상세 보기까지 확인한다.

헉  죄다 빨간색이었다.

급감속 1회, 과속 급감속 1회,  과속 급감속 2회, 과속, 어떤 날은 과속구간이 3.5km나 되었다.

'무결점 운전을 해내셨군요' 요런 멘트는 아주 가뭄에 콩 나듯 한다.  

시험 이의 신청을 하러 갔다가 OMR 카드까지 확인하고 깨깽~한 격이니

이거 완전 빼박, 내 내점수가 맞았다.


-도대체 지금까지 운전한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금까지 알아 온 베스트드라이버라 자칭하는 나는 누구인가

-운전할 때 나는 도대체 어떤 자아인가


자아분열, 자아검열이 필요한 시간이다.

눈을 감고, 호흡을 두어 번 크게 들이마셨다 다시 내뱉는다.

복식호흡하듯  출근길 드라이브를 복기한다.


도로를 달린다. 매일 가는 출퇴근 길. 익숙한 길이다. 도서관까지 카메라는 5개, 그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있다. 이것은 속도를 줄여야 하는 구간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거리는 한산하다. 내가 사는 작은 도시는 웬만하면 차가 막히는 구간이 없다.

그러나 규정속도 50km.

처음부터 내가 과속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규정 속도를 지키려고 천천히 가면 내 뒤를 바짝 쫓아오는 뒤차들이 부담스러웠다.

'여자라서, 천천히 간다.' '아휴 답답해'

뒤차 운전자들의 한숨소리,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속도를 높인다.

카메라에만 안 걸리면 되지

카메라 3초 전, 쓱 엑셀에서 브레이크로 발을 바꿔댄다

성공~ 다음 카메라까지 3km 남았다.


맞다. 맞아

나의 운전 점수는 38점

과속카메라를 완벽하게 속였으나 티맵만은 속일 수가 없었다.


과연, 38점은 나의 운전 점수뿐일까?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며 친환경 어쩌고저쩌고 해 놓고

세탁세제들은 늘 용량 이상으로 과다투여하니

나의 친환경 점수도 38점

시험은 과정이 중요하지, 결과는 중요하지 않단다 해놓고

막상 딸이 점수를 받아오면, 이 문제를 왜 틀렸냐고 다그치는

엄마의 이중성 점수도 38점

얘들아, 좀 치우고 살자며 폭풍 잔소리 쏟아놓으면서

장롱 속에는 지난 봄옷이 그대로 쌓여, 가을옷으로 둔갑하였으니

나의 정리정돈 점수도 38점


반성! 반성! 반성! 통렬하게 반성한다.


아, 그렇다면 나는 당장 나의 38점짜리 운전 습관을 바꿔야 할까?

요 문제는 살짝 퀘스천마크다. 반신반의다.

당장 규정 속도를 지키자니

막힘없는 이 작은 도시의 도로의 원활한 흐름을 깨야한다.

또한 뒤차 운전자의 답답함을 어찌 외면할 것인가?

그렇다고 과속을 택할 수도 없다.

선진 시민의 양심과 보험료 할인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

가문이냐 사랑이냐  

과속이냐 규정속도냐다


우선 어설픈 대안으로 출근길에는 티맵을 끄고 살짝 막히는 퇴근길에만 티맵을 켜기로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놀랍게도 운전 점수가  높아졌다.

41점이다. 려 3점이나 올랐다.

하하하, 기분이 너무 좋았다.


런데 또다시 나의 과오가 스친다.

딸이 지난 수학시험에서 65.3점에서 68.7점으로 올랐다고 그리 좋아했건만

겨우 그 점수로 좋아하냐며 한심한 표정을 짓던 나의 모습.

나는 그때  진짜 38점짜리 엄마였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지금부터니

엄마로서의 점수도 차차 올리기로 마음먹는다.


막상 점수가 올라가니, 나는 규정 속도를 지켜나가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나의 티맵 운전 점수가 50점을 넘어 76점을 넘기는 날까지  

파이팅~

인터넷 검색창에 '티맵 점수 올리는 범'을 검색한다.

급감속만 줄여도 금세 오를 것도 같다.

'별 걸 다 공부한다'며 남편이 한심하다는 듯 한 마디 툭 던진다.


순간, 남편의 티맵 점수가 궁금했다.

당신 티맵 점수 몇 점이야?

83점이란다.

헐 꿈의 점수다.

부럽다. 진짜 다 가진 남편이다.


p.s 브런치 구독자의 티맵 점수는 몇 점일까요? 혹시 38점 이하가 계시다면 살포시 왼쪽 손을 올려주세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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