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면 시어머니를 닮아가는 며느리의 편지
명절 차례상 앞에서, 시어머니께 띄우는 두번째 편지 입니다.^^
아래 글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모두들 행복한 명절을 되세요
어머님, 안녕하세요. 어머님, 하나뿐인 며느리 지수 엄마입니다.
오늘은 추분입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고, 아침 공기가 제법 차갑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계절의 흐름이 어머님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을까요. 영혼의 시간은 절기와 상관없이 평온하고 따뜻하기만을 바랍니다.
추분이 지나면 곧 추석입니다. 이맘때면 어머님은 명절 준비에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셨습니다. 마늘을 까고, 파를 다듬고, 깨를 볶으며 그 많은 일들을 말없이, 티 나지 않게, 묵묵히 해내셨습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맵고 지루하고 고된 시간이었다는 것을요. 어머님의 치매가 깊어져 요양병원에 가신 뒤, 혼자서 명절 차례상을 준비하면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머님처럼 정성 들여 손질하지 못합니다. 그냥 마트에서 깐 마늘, 손질된 파, 볶은 깨를 사서 쓰고 있습니다. 물가도 많이 올랐습니다. 모두 국내산으로 준비하기엔 살림살이가 빠듯합니다. 미국산이든 중국산이든, 따지지 않고 씁니다. 그래도 그 양념들로 차례상 음식의 간을 맞추는 일만큼은 성심성의껏 하고 있습니다.
시어머님과 닮아가는 순간들
어머님 기억하시나요? 어머님이 제게 처음 해주신 칭찬은 음식에 간을 참 잘 맞춘다는 거였습니다. 어머님의 맛있는 음식의 기준은 '간'이었지요. "음식은 간만 잘 맞으면 돼"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어머님의 음식이 유독 달고 맛있던 건 미원의 힘도 조금 있었지요. 저도 그때 어머님께 배워 살짝 미원을 넣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 미원 대신 참치액젓을 넣습니다. 국에도, 나물에도요. 미원보다는 덜 달지만, 그 감칠맛이 제 요리에도 제법 스며들고 있습니다.
명절만 되면 저는 어머님을 닮아갑니다.
친정엄마가 아닌, 차례 음식상을 몸소 가르쳐주신 어머님을요. 어느 날, 친정어머니가 동그랑땡에 넣을 양파를 다지고 계셨는데, 물기를 빼지 않고 그냥 고기와 두부에 섞어 속을 버무리시더라고요. 저는 속으로 놀랐습니다.
‘양파는 꼭 짜야하는데, 그래야 물기가 없는데…’
어머님은 음식에 물기 많은 걸 싫어하셨잖아요. 베보자기에 넣고, 손등에 힘줄이 솟도록 꼭 짜내시던 그 손길.
저도 그걸 배워, 지금도 그렇게 짜고 또 짜냅니다. 그런 제 모습에서 어머님을 봅니다.
어머님을 닮아가는 건, 음식 레시피만이 아닙니다.
생활의 리듬마저도 닮아갑니다. 명절 아침이면, 저도 어느새 새벽 5시에 눈을 뜨고 앞치마를 동여매고 있습니다.
요즘 차례상에서 변해야 하는 것들
하지만 어머님, 올해는 차례상 음식 몇 가지는 줄이려 합니다. 두부부침, 넙적 부침개, 동태 전은 부치지 않겠습니다. 이젠 아무도 먹지 않고, 매번 냉장고에서 일주일쯤 있다가 버려지니 죄짓는 기분이 들어요. ‘예의’가 아니라 ‘낭비’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몇 해 전부터 산적에도 꽂이를 꿰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님이 그러셨지요.
“산적은 꼭 꽂이에 꿰어야지. 안 그러면 뼈 없는 자손을 낳는다.”
하지만 어머님의 손녀딸들, 특히 고등학생이 된 둘째는요, 속은 없어도 뼈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차례상 가짓수를 줄여도 다들 무탈하게 잘 살아갈 테니까요.
올해는 음식 종류도 조금 바꿔보려 합니다.
약과는 미니약과로, 사탕은 커피맛 대신 레몬맛으로, 부서지기 쉬운 유과 대신 울퉁불퉁해도 바삭한 과줄을 올릴까 해요. 그리고 차례상에는 올리지 않던 잡채와 갈비찜, 어머님이 좋아하셨던 과일 샐러드도 함께 준비해 볼게요. 물론, 하나뿐인 며느리의 컨디션이 괜찮다면 말이지요.
차례상이 짐이 아닌 부모님께 드리는 맛있는 한 끼로
어머님, 솔직히 말하면 예전에는 명절이 참 부담스러웠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시조부모님의 차례상을 차리는 일이 그저 숙제 같고, 의무 같았어요. 그런데 어머님과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엔 그 상차림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명절이, 사랑하는 부모님께 맛있는 아침 한 끼를 대접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며느리의 짐이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님께 마음을 전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호박전을 부치면 아버님이 생각나고, 동그랑땡을 부치면 어머님이 떠오릅니다. 간도 평소보다 조금 짭짤하게 맞춰봅니다. 숙주나물을 삶고 나면 “물기를 좀 더 짜야지” 잔소리하시던 어머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립니다. 솔직히 딸만 둘인 저에게 아들 손주 타령하시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그래도 저는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치매로 자신의 나이는 기억 못 하시면서도, 손녀딸의 유치원 귀가 시간만큼은 꼭 기억해 내셨던 어머님의 사랑. 그 마음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으니까요.
어머님, 올해도 저는 부족하지만 진심으로 상을 차려보겠습니다. 음식가짓수는 줄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제 마음은 더 깊어졌음을 꼭 기억해 주세요. 명절날, 다시 뵙겠습니다. 아버님 손 꼭 잡으시고, 차례상 드리서 오십시오.
"맛있다. 맛있다 음식은 그냥 간만 맞으면 된다"는 살아계실 때 말씀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추신)
옆에 있던 어머님의 아들이 한마디 묻습니다. 지난주 일요일에 한 벌초가 마음에 드셨냐고요
부모님의 머리를 파르라니 깎아드렸다고 좋아합니다. 칭찬이 고픈 오십 한 살 아들에게도 잘했다고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