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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Jun 05. 2024

사려 깊은 강원도

커다란 벚꽃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꽃잎을 집어 올렸다.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 사이로 꽃잎의 결이 부드럽게 속삭인다. 가녀리지만 섬세한 꽃잎이 겨우내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봄이 왔구나. 벚꽃 잎이 피고 지는구나.     


산책길에 만난 꽃나무들은 이내 연둣빛 어린싹을 틔우더니 부지런히 초록잎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몇 개월 바싹 마른 몸으로 죽어있는 듯 보이던 그네들의 몸이 따뜻한 공기를 머금고 기지개를 켠다.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을 지나 6월에 접어들자 그들은 더욱 푸르게, 푸르게 본인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  

     



사람들은 국내로 해외로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닌다. 나 또한 아들과 함께 강원도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주말에도 학원에 가야 하는 그의 스케줄에 맞춰 저녁때가 되어서야 평창으로 출발했다.     


평창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밤 9시 반 정도. 숨 돌리고 짐을 풀자마자 잘 시간이다. 잠 잘 준비만 했을 뿐인데 집에서 그 시간대 느꼈던 마음과 달리 가볍고 산뜻하다. 내일 아침 일어나 눈앞에 마주할 초록의 싱그러움과 청량한 공기가 기대되는 밤이다.      


몸이 고단해 늦잠을 잘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진다. 허리가 뻐근하고 어깨가 뭉친 듯 하지만 기분만은 날아갈 것 같다. 진작 올걸. 비행기 타고 멀리 가면 더 좋겠지만 이 정도만 나와도 기분 전환이 된다. 두툼한 커튼을 시원하게 젖히고 창문을 스르륵 열었다. 그곳의 나무들이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며 응석 부리듯 반겨준다.     


그래, 이 맛에 여행 오는 거지. 각 잡히고 뽀송한 이불을 덮고 잔 후 아침을 맞이하는 여유로운 이 기분. 코와 입을 타고 들어온 맑은 공기가 온몸 구속구석 휘감는다. 온종일 그곳에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지만 강원도 온 김에 바다도 보고 싶다. 본격적으로 바다를 보기 전 밥 먼저 먹어야겠다.      


강릉에 감자전 맛집이 있다는 소식을 유튜브로 전해 들었다. 감자전이야 어디든 맛이 있을 테지만 입맛 까다로운 호텔 사장이 추천한 맛집이란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 후 자리에 앉았다. 주변 테이블을 쓱 둘러보니 감자전과 메밀전병은 필수로 주문하는 분위기다. 바삭하게 구워진 메밀전병이 먼저 나왔다.


“이거 만두예요? 바삭바삭하네요.”     


젓가락으로 메밀전병 한 조각을 집어 들고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들 말대로 군만두 같은 식감이다. 알던 메밀전병과 달리 기름에 튀긴 듯 노릇노릇하게 잘도 구워냈다. 전병 속 적당하게 익은 김치가 감칠맛을 더해준다. 만두 같은 만두 아닌 메밀전병이다. 메밀전병을 다 먹어갈 즈음 부추로 고명을 올린 감자전이 상에 올라왔다. 동그랗고 넓적하게 부쳐낸 감자전 한 귀퉁이를 뜯어 우물우물거렸다. 감자의 본고장에서 감자전을 먹으니 안 그래도 맛있는 감자전이 더욱 입에 착착 감긴다.         




만복에 만족을 느끼며 강릉 바다로 향했다. 카페가 모여 있는 안목해변으로 선택했다. 때 마침 주차 자리가 있어 어렵지 않게 진입할 수 있었다. 전망 좋은 카페를 찾아볼까 하던 중 아들이 보트를 타야겠단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그와 함께 보트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빨간색 구명조끼를 입고 안목 해변에 둥둥 떠 있는 하얀색 보트 위로 올라탔다. 세 명의 중년 여인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곧이어 20대로 보이는 젊은 여행객이 합류하자 운전대를 잡은 가이드 분이 출발합니다,라고 입을 열었다. 그는 출발 전, 아들의 팔짱을 끼라고 귀띔해 줬다.     


90년대에 나왔을법한 신나는 트로트 음악이 들리더니 위잉~하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물길을 가르며 보트가 공중에 뜨듯 출발한다. 출발과 동시에 내 몸도 붕 뜨고 있었다. 살짝만 잡고 있던 아들의 팔뚝을 세차게 움켜쥐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어머, 어머, 어떻게. 어머.. 꺄악.”     


가이드 분은 핸들을 휙휙 꺾고 거의 90도로 보트를 기울이면서 연신 난폭운전을 해댔다. 처음엔 당황하고 놀라다가 5분 즘 지나자 속이 뻥 뚫리는 신기한 기분이 들더라. 소리를 내지를수록 몸에 쌓인 스트레스가 밖으로 빠져나가 공중으로 분해되는 느낌이다. 보트를 타는 10분 내내 하도 소리를 질렀더니 목이 다 쉰 듯했다. 내 목청에 내 고막이 놀란 듯 머릿속이 멍멍해졌다.     


“그렇게 무서웠어요? 난 재미있던데.”     

“윽. 무섭긴 한데 재미있었어. 하하하”     


아들은 남자답게 별거 아니라는 반응이다. 아들 앞에서 주책스럽게 호들갑을 떤 것 같아 잠깐 머쓱했지만 속풀이 한번 진심으로 했다. 늘 이런 식이다. 아들의 제안에 마지못해 따라가지만 내가 더 깊숙하게 즐기는 모습. 허허.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눈앞에 보이는 아무 카페에 들어갔다. 아무 카페나 들어갔을 뿐인데 창밖 너머 풍경이 제대로다. 사려 깊은 강원도 바다, 그 한가운데 좀 전에 탔던 보트가 다른 고객들을 태우고 신명 나게 물살을 가르고 있다. 누군가 나처럼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게 소리를 내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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