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무애법계는 건너뛰는 자리가 아니라 통과해야 열리는 자리다
화엄(華嚴)에서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는 가장 높은 자리다.
사(事)와 사(事)가 막힘 없이 서로 통하는 세계. 하나의 구슬에 모든 구슬이 비치고, 모든 구슬에 하나의 구슬이 비치는 인드라망의 자리. 화엄의 네 법계 중 마지막이고, 도달하기 어렵기로 이름난 자리다.
그런데 이 자리는 늘 멀게 느껴졌다.
인간의 인지는 범주로 작동한다. 보는 순간 분류하고, 듣는 순간 이름 붙이고, 만나는 순간 묶는다. 범주화는 인간 인지의 기본 운영체제다. 그런데 사사무애는 범주의 벽이 사라진 자리다. 범주가 기본인 인지로 어떻게 범주 너머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 모순 앞에서 사사무애는 인지 너머의 자리,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자리처럼 보였다.
이 의심에는 두 가지 오해가 들어 있었다.
첫째 오해는 사사무애가 범주를 **건너뛰는** 자리라는 것이다. 범주를 무시하고, 분별을 버리고, 단숨에 통하는 자리. 그래서 머리를 쓰지 말고, 따지지 말고, 그냥 놓아버리라고 한다. 이것은 신비주의의 길이다. 매혹적이지만 도달이 확인되지 않는 길이다.
둘째 오해는 사사무애가 범주를 **부수는** 자리라는 것이다. 모든 경계는 환상이니 깨뜨려라. 분별은 미혹이니 지워라. 모든 것이 하나라고 외치는 길. 이것은 해체의 길이다. 깨뜨릴 수는 있지만, 깨뜨린 뒤에 비춰질 것이 남지 않는다.
두 길 다 사사무애에 도달하지 못한다.
건너뛰면 닿을 수 없다. 출발한 적이 없으니까. 부수면 비춰질 것이 없다. 비출 사(事)가 사라졌으니까. 사사무애는 사(事)와 사(事)의 무애(無礙)다. 사가 없으면 무애도 없다. 범주를 부정하는 길은 사사무애의 정의 자체를 무너뜨린다.
세 번째 길이 있다.
사사무애는 범주를 **통과해야** 열린다. 건너뛰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다. 부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범주를 세우고, 세운 범주의 벽을 보고, 그 벽이 누군가 붙여놓은 접착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접착제가 시간이 지나 굳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굳음을 풀어 다시 이음새를 보고,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본다.
그 끝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사(事)와 사(事)가 인과로 묶이지 않은 채로 서로 비추고 있다. 한 사(事)가 다른 사(事)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한 사(事)가 다른 사(事)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인 채로 있는데, 그 안에 다른 모든 사(事)가 비친다. 인과 없이 통하는 자리. 이것이 사사무애다.
이 자리는 범주를 거치지 않고는 열리지 않는다.
범주를 한 번도 세워보지 않은 사람은 범주의 벽을 모른다. 벽을 모르면 벽 너머도 없다. 벽을 인식한 사람만이 벽을 통과할 수 있다. 범주의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범주 너머를 본다. 범주를 우회한 사사무애는 가짜 사사무애다. 그것은 사사무애가 아니라 범주의 회피다.
그렇다면 범주를 어떻게 통과하는가.
여기서 걸림이 등장한다. 매끄럽게 지나가면 범주의 벽을 인식하지 못한다. 벽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매끄러움 속에서 범주는 투명하다. 보이지 않는 벽은 통과할 수 없다. 벽이 보여야 통과 여부를 묻기 시작한다.
걸려야 벽이 보인다.
탄생석이 당연한 것이라고 매끄럽게 받아들이면 "당연함"이라는 범주의 벽이 보이지 않는다. 1912년이라는 숫자에 걸려서 멈춘 사람만이 그 벽을 본다. 벽을 본 사람은 그 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묻고, 누가 만들었는지 묻고, 그 만듦이 굳어버린 과정을 따라간다. 따라가는 동안 벽은 점점 얇아진다. 그리고 끝에 가면, 벽이 사라진 게 아니라 벽 너머가 비치기 시작한다.
걸림은 장애물이 아니다.
입구다. 사사무애로 가는 유일한 통로다. 걸리지 않은 사람에게 사사무애를 가르칠 수 없는 것은 그래서다. 그는 통로 앞에 서 있지도 않은 사람이다. 가르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걸리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인드라망의 구슬이 서로를 비추는 원리도 여기서 보인다.
구슬이 서로 가까이 있어서 비추는 것이 아니다. 구슬이 합쳐져서 비추는 것도 아니다. 각 구슬이 자기 자리에서 끝까지 자기인 채로 있을 때, 다른 구슬이 그 안에 비친다. 자기다움이 사라지면 비춤도 사라진다. 범주가 없어져서 통하는 게 아니라, 범주가 끝까지 범주인 채로 있을 때 통한다. 사(事)가 사(事)인 채로 있을 때 사사무애가 일어난다.
걸림연구소는 그래서 걸림에서 출발한다.
걸림 없는 통합은 통합이 아니라 뭉개짐이다. 걸림 없는 화합은 화합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걸림 없는 사사무애는 사사무애가 아니라 회피다. 사사무애에 도달하려는 자는 먼저 걸려야 한다. 매끄러움을 거부해야 한다. 그럴듯함에서 멈춰야 한다. 끝까지 걸려야 한다.
걸림의 끝에서 비로소 막힘 없음이 열린다.
이것이 걸림연구소의 첫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