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이 먼저고, 질문은 그다음이다
탄생석에 걸렸을 때, 질문이 먼저 온 게 아니다.
"1912년이라고?" 이건 아직 질문이 아니다. 멈춘 것이다. 매끄럽게 지나가야 하는데 못 지나간 것이다. 당연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뭔가 안 맞는 느낌. 그 느낌이 먼저였다. "왜 이게 당연하지?"는 그다음에 왔다. 멈춘 뒤에 만들어진 형태다.
질문에는 형태가 있다.
"왜?" "정말?" "누가 정했지?" 전부 언어다. 언어라는 건 이미 가공된 것이다. 기존 범주 안에서 구성된 것이다. "왜 이게 당연하지?"라는 질문 안에는 "당연함"이라는 범주가 이미 들어 있다. 질문은 범주를 전제하고, 범주 위에서 작동한다. 질문은 걸림의 결과이지, 걸림 자체가 아니다.
걸림에는 형태가 없다.
아직 말이 되기 전의 상태다. 매끄럽게 지나가야 하는데 못 지나가는 느낌. "뭔가 이상한데"조차 아직 아니다. 이상하다는 판단도 형태니까. 걸림은 그보다 앞에 있다. 몸이 먼저 안다. 발이 멈춘다. 눈이 머문다. 글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속도가 줄어든다. 왜 줄었는지 아직 모른다. 그런데 이미 멈췄다. 머리가 따라오는 건 그다음이다. 머리가 따라와서 언어를 붙이면, 그때 비로소 질문이 된다.
걸림이 먼저고, 질문은 나중이다.
이 순서가 중요한 건 교육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는 교육은 질문을 가르친다. "왜?"라고 물어라. 증거를 확인하라. 전제를 의심하라. 맞는 말이다. 필요한 훈련이다. 그런데 이것은 형태를 가르치는 것이다.
걸리지 않은 사람에게 질문의 형태를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왜?"라고 묻기는 한다. 그런데 방향이 없다. 어디를 향해 "왜?"라고 묻는지 모른다. 모든 것에 "왜?"를 붙일 수는 있지만, 모든 곳에 "왜?"를 붙이는 사람은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걸림이 방향을 준다. 여기서 멈췄으니까 여기를 판다. 걸림 없는 질문은 형식은 있는데 방향이 없다.
걸림은 가르칠 수 있는가.
가르칠 수 없다. 걸림은 살아온 시간이 만든다. 50년 바둑을 둔 사람이 바둑판에서 걸리는 것과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걸리는 것은 다르다. 37년 통계를 가르친 사람이 숫자에서 걸리는 것과 숫자를 모르는 사람이 걸리는 것은 다르다. 걸림은 축적의 산물이다. 축적은 시간이 만든다. 시간은 가르칠 수 없다.
가르칠 수 있는 건 질문이다. 질문은 걸림 이후다. 그러나 걸림이 없으면 질문은 빈 형식이다. 교육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가 여기에 있다. 멈추는 법은 가르칠 수 없다. 멈춘 뒤에 무엇을 할지는 가르칠 수 있다.
걸림은 질문 이전이다. 그리고 질문 이전의 것이 질문보다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