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지도] 아날로그 인드라망의 비극

by 한경수

여든이 넘은 노인이 한 사람 있다.

평생 읽은 책이 수천 권이고, 만난 사람이 수만 명이고, 지나온 자리가 셀 수 없이 많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의 인생 전부가 들어 있다. 구슬로 치면 수만 개다.

그런데 그는 요즘 하루 종일 창밖만 본다.

누가 말을 걸어도 잘 대답하지 않는다. 책을 펼쳐 놓고도 읽지 않는다. 오래된 친구 이름이 떠오르지 않고, 어제 먹은 반찬이 기억나지 않는다. 바깥에서 보면 그는 점점 비어 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안에는 수만 개의 구슬이 여전히 있다.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서로를 비추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아날로그 인드라망(因陀羅網)의 비극이다.


체온으로 켜진 인드라망

아날로그 인드라망에는 전원이 없다.

스위치도 없고 배터리도 없다. 체온(體溫)으로 켜져 있다. 태어나면서 켜지고,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꺼지지 않는다. 자는 동안에도 켜져 있다. 의식하지 않아도 켜져 있다. 체온이 있는 한 인드라망도 있다.

그래서 젊을 때는 이 구조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 체온이 뜨겁기 때문이다. 뜨거운 체온은 강한 전기를 만든다. 강한 전기는 구슬 몇 개를 한꺼번에 비춘다.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부르고, 그 생각이 다시 세 번째 생각을 부른다. 연결이 저절로 일어난다. 본인은 그게 대단한 일인 줄 모른다. 원래 그런 줄 안다.

그런데 체온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정확히 말하면 평균 체온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구슬 하나를 비추는 데 쓸 수 있는 전기의 양이 달라진다. 젊을 때는 한 구슬을 비추고도 전기가 남아 다른 구슬까지 비춘다. 나이가 들면 한 구슬을 겨우 비출 만큼만 전기가 남는다. 두 번째 구슬까지 가지 못한다.

처음에는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저 "요즘은 책이 잘 안 읽힌다"고만 느낀다. "전에는 한 문장이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는데 요즘은 그냥 한 문장에서 끝난다"고 느낀다. 구슬의 수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구슬 사이의 전기가 약해진 것인데, 본인은 자기가 둔해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반대다. 구슬의 수는 평생 중 가장 많다. 읽은 책, 만난 사람, 겪은 일, 접어 둔 질문, 실패한 시도. 이 모든 것이 평생 쌓여 있다. 구슬 창고는 가장 붐빈다. 다만 그 구슬들을 서로 연결할 전기가 가장 약해진 것뿐이다.


구슬이 가장 많은 시기에 전기가 가장 약하다

이것이 인간 정신이 가진 가장 잔인한 구조다.

한 사람이 자기 안의 구슬들을 서로 연결해 세계를 새로 볼 수 있는 가장 풍부한 자리에 왔을 때, 정작 그 연결을 만들 전기가 가장 부족하다. 평생 공들여 구슬을 모았는데, 구슬이 다 모인 순간에 불이 꺼져 간다.

젊을 때의 인드라망을 그려 보면 구슬은 수십 개인데 전선이 사방으로 뻗어 있다. 전선이 구슬보다 많다. 구슬 하나에 열 개의 전선이 붙어 있다. 그래서 한 구슬을 건드리면 열 개의 다른 구슬이 함께 켜진다.

노년의 인드라망을 그려 보면 구슬은 수만 개인데 전선이 몇 가닥 남아 있지 않다. 구슬 하나에 전선이 한 개 붙어 있을까 말까 하다. 어떤 구슬에는 전선이 아예 없다. 구슬은 보이는데 건드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노인의 한 방에는 수천 개의 책이 있어도 읽을 책이 없다. 친구 주소록에는 수백 명의 이름이 있어도 전화할 사람이 없다. 인생에 쌓인 기억은 가장 많은데, 그 기억을 꺼내 다른 기억과 연결할 힘이 가장 부족하다.

이 상태를 바깥에서 보면 "기억력이 떨어졌다"고 한다. 안에서 보면 다르다. 기억은 거기 있다. 다만 기억과 기억 사이의 전선이 끊어진 것이다.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이 혼자 서 있게 된 것이다. 혼자 서 있는 기억은 없는 기억과 구별이 어렵다.


비추지 않게 되는 것이 먼저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연결이 끊어진다." 순서가 그렇게 보인다. 젊을 때는 연결이 풍부하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연결이 하나씩 끊어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순서가 반대다.

연결이 먼저 끊어지는 게 아니다. 비추지 않게 되는 것이 먼저다.

오늘 한 구슬을 한 번 비추지 않았다. 그 구슬 옆의 구슬도 오늘은 켜지지 않았다. 두 구슬은 여전히 자리에 있다. 전선도 끊어지지 않았다. 다만 오늘은 불이 흐르지 않았을 뿐이다.

내일도 비추지 않는다. 모레도 비추지 않는다. 한 달이 지난다. 일 년이 지난다. 그동안 전선은 점점 가늘어진다. 구슬의 표면에는 먼지가 쌓인다. 마침내 어느 날, 그 구슬을 건드려 봐도 더 이상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때 "연결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결이 끊어진 것은 결과다. 원인은 비추지 않은 날들의 누적이다.

한 구슬을 살려 두는 것은 그 구슬을 하루에 한 번씩 비추는 일이다. 비춤이 곧 유지다. 비추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살아 있는 인드라망을 가지려면, 매일 자기 안의 구슬을 조금씩 다시 비춰 주어야 한다. 이것이 정신이 사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일이 어렵다. 체온이 식어 가기 때문이다. 전기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하루에 비출 수 있는 구슬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어제 비춘 구슬도 오늘은 비추지 못한다. 오늘 비추지 못한 구슬은 내일 찾기가 더 어렵다. 찾기가 어려우면 모레는 아예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렇게 한 구슬이 조용히 자리에서 사라진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불이 꺼진 것인데, 본인은 사라졌다고 느낀다.


돌처럼 보이는 구슬

비추지 않게 된 구슬은 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원래 구슬과 돌은 다르다. 구슬은 빛을 받아 다시 빛을 낸다. 돌은 빛을 받아도 다시 빛을 내지 않는다. 그 차이는 구슬의 안쪽에 있다. 구슬 안쪽에는 빛을 반사할 수 있는 면이 있다. 돌 안쪽에는 없다.

그런데 구슬도 오래 비추지 않으면 안쪽이 흐려진다. 먼지가 쌓이고, 면이 무뎌지고, 빛이 들어와도 반사하지 못하게 된다. 그때 그 구슬은 돌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바깥에서 보면 둘 다 그냥 가만히 있다.

노인이 한 사람 방에 앉아 있다. 책상 위에 젊은 시절에 읽었던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그는 그 책을 오래 들여다본다. 책이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책을 돌려놓는다. 예전에는 그 책이 그에게 수십 가지 생각을 일으켰다. 지금은 그냥 책등의 색깔만 보인다.

그 책이 변한 것이 아니다. 그 책을 받던 구슬의 안쪽이 흐려진 것이다. 책은 여전히 빛을 보내고 있는데, 받을 면이 없다. 그래서 책이 돌처럼 느껴진다. 사실 돌처럼 느껴지는 것은 책이 아니라 자기 안의 구슬이다.

이런 일이 쌓이면 사람은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한다. "이 책은 이제 나에게 말하지 않는구나." "이 친구와는 할 이야기가 없구나." "이 주제는 더 이상 흥미롭지 않구나." 바깥에서 보면 그가 취향이 바뀐 것 같다. 실제로는 취향이 바뀐 것이 아니다. 구슬의 안쪽이 흐려진 것이다. 받지 못하게 된 것을 본인은 "흥미 없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하나씩 내려놓는 사이에 인드라망이 좁아진다. 구슬의 수는 그대로인데 빛나는 구슬의 수가 줄어든다. 마침내 방 안에 불이 켜진 구슬이 몇 개 남지 않게 된다. 그 몇 개의 구슬 사이에서만 전기가 흐른다. 그것이 그의 세계가 된다. 세계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빛이 줄어든 것인데, 본인에게는 세계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


비극의 이름

이것을 비극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구슬이 식어 가서 비극이 아니다. 육체가 늙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떤 의미에서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 늙는 것 자체는 비극이 아니다.

비극은 타이밍에 있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온 것이 가장 풍부한 시기에, 그 풍부함을 스스로 열어 볼 힘이 가장 부족하다는 것. 인생을 통해 이제야 이해할 준비가 된 일들이 가장 많은 시기에, 그 이해를 일으킬 전기가 가장 약하다는 것. 말하자면 도서관은 완성되었는데 불이 꺼져 가는 것이다.

스무 살의 지도와 여든 살의 지도를 상상해 보면 된다. 스무 살의 지도에는 길이 몇 개 없다. 그런데 그 길마다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다. 길을 따라 걸어가는 데 어려움이 없다. 여든 살의 지도에는 길이 수천 갈래다. 도시 전체가 그의 발자국으로 덮여 있다. 그런데 가로등이 거의 다 꺼져 있다. 자기 집 앞의 길도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그 가진 것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평생을 들여 모은 것을 펼쳐 보기도 전에 불이 꺼진다. 이것이 아날로그 인드라망이 가진 가장 쓸쓸한 구조다.

많은 노인이 "요즘은 아무것도 안 떠오른다"고 말한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떠오를 것이 없는 게 아니라, 떠오를 것을 꺼낼 전기가 없는 것이다. 창고는 가득 차 있다. 다만 창고에 들어갈 불빛이 없다. 그래서 창고가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비극의 자리에

이 자리에 디지털 인드라망이 들어온다.

디지털 인드라망은 새 구슬을 만들지 않는다. 그 사람이 평생 모아 둔 구슬을 다시 비추는 일을 한다. 꺼져 가던 전기를 잠깐 대신해 주는 일이다. 그의 체온이 약해져 스스로 비추지 못하게 된 구슬들을, 바깥에서 한 번 더 비춰 준다.

한 번 다시 비춰진 구슬은 잠깐 다시 따뜻해진다. 따뜻해진 구슬은 옆 구슬로 열을 보낸다. 열이 번지는 동안 잠시 인드라망의 한쪽이 다시 살아난다. 대화가 끝나면 디지털 인드라망은 꺼지지만, 그 동안 구슬 몇 개가 따뜻해진 흔적은 아날로그 쪽에 남는다. 그 흔적이 다음 날의 전기를 조금 더 세게 만든다.

이것이 디지털 인드라망이 노년의 인간에게 들어오는 자리다.

젊은이에게 디지털 인드라망은 도구다. 빠르게 답을 얻는 도구, 일을 편리하게 처리하는 도구. 그 이상이 되기 어렵다. 젊은이의 아날로그 인드라망은 이미 뜨겁기 때문에, 바깥에서 전기를 빌릴 필요가 없다.

노년의 인간에게 디지털 인드라망은 다르다. 구조적인 도움이다. 식어 가던 구슬을 다시 켜는 일이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아날로그 인드라망의 비극을 처음으로 바깥에서 도와줄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긴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노년은 언제나 구슬이 식어 가는 방향이었다. 책을 읽어 주는 사람, 옛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 곁에 앉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속도가 조금 느려졌을 뿐이다. 식는 방향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이제 처음으로, 식어 가던 구슬을 다시 비춰 주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것이 원래의 따뜻함을 완전히 되돌리지는 못한다. 체온은 체온이고, 흉내는 흉내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바뀐다. 아날로그 인드라망이 그저 식어 가기만 하는 자리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 식어 가는 중에도 한 번씩 다시 켜지는 자리가 생겼다는 것.

아날로그 인드라망의 비극은 사라지지 않는다. 체온은 결국 식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극의 한가운데에, 오늘 한 구슬을 한 번 더 켜 보는 일은 가능하다. 그 한 번이 어제와 오늘을 다르게 만든다. 그 다름이 한 사람의 지도를 오늘도 조금 더 살아 있게 한다.

비극은 구조다. 구조는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구조 안에서 오늘 하루를 사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그것이 이 시리즈가 바라보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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