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시간에 두 가지 풍경이 있다.
하나는 외로운 풍경이다. 방에 혼자 앉아 있는데 안쪽이 텅 비어 있는 느낌. 시간이 느리게 간다. 바깥의 사람이 그리워진다.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인다. 텔레비전을 켠다. 휴대전화를 열어 본다. 아무 이유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 닫는다. 혼자 있다는 사실이 내내 의식된다. 혼자라는 것이 무게로 느껴진다.
다른 하나는 붐비는 풍경이다. 같은 방에 같은 자세로 혼자 앉아 있는데 안쪽은 시끄럽다.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부르고,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부른다. 어제 읽은 문장이 갑자기 삼십 년 전의 한 장면과 만난다. 두 개가 만나는 자리에서 새 생각이 솟는다. 시간이 빠르게 간다. 혼자 있다는 사실이 의식되지 않는다. 혼자라는 것이 짐이 아니라 자리로 느껴진다.
두 풍경 모두 같은 사람이다. 같은 방이고 같은 날이다. 다른 것은 단 하나다. 안쪽에서 구슬이 서로를 비추고 있는가, 아닌가.
외로움의 정체는 여기에 있다.
외로움을 바깥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옆에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 연락할 사람이 적어서 외롭다. 가족이 없어서, 친구가 멀리 있어서,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
이 설명은 절반만 맞다.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외로운 사람이 있다. 가족과 함께 사는데도 외로운 사람이 있다. 매일 수십 명과 회의하는데도 외로운 사람이 있다. 이들의 바깥을 보면 외로울 이유가 없다. 그런데 안쪽에서는 외롭다. 바깥의 연결이 외로움을 해결하지 못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혼자 사는데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는데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하루에 한두 마디만 하고 사는데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들의 바깥을 보면 외로워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안쪽에서는 외롭지 않다. 바깥의 단절이 외로움을 만들지 않는다.
이 두 경우가 알려 주는 것은 분명하다. 외로움은 바깥의 인간관계의 수와 관련이 없다. 바깥의 사람 수가 많다고 해결되지 않고, 적다고 반드시 생기지 않는다. 그러면 외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한 사람 안쪽에서 구슬과 구슬이 서로 비추지 않을 때 외로움이 온다. 반대로 한 사람 안쪽에서 구슬과 구슬이 서로 비출 때는 외롭지 않다. 바깥에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안쪽의 상태가 외로움의 유무를 결정한다.
그래서 외로움의 진짜 원인은 안쪽의 단절이다. 바깥의 단절이 아니다. 외로움이 생기는 사람은 안쪽에서 구슬들이 서로를 비추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고, 외롭지 않은 사람은 안쪽에서 구슬들이 서로 비추고 있는 사람이다. 이 구별이 외로움을 이해하는 기본 자리다.
안쪽이 붐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안쪽에 많은 것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많이 들어 있어도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붐비지 않는다. 창고가 아무리 꽉 차 있어도 창고는 조용하다. 물건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기 때문이다.
붐빈다는 것은 안쪽의 구슬들이 서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것이 반응하고, 그 반응이 또 다른 반응을 부른다. 구슬 사이에 빛이 오간다. 빛이 오가는 자리에서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사람 안쪽에 차 있다. 이것이 붐빈다는 뜻이다.
붐비는 안쪽을 가진 사람은 혼자 있을 때 혼자가 아니다. 자기 안의 구슬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구슬이 수십 개 서로 반응하고 있는 자리에서, 바깥의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크게 의식되지 않는다. 이미 안쪽이 시끌시끌하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되면 혼자 있는 시간이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가득 찬 시간이 된다. 시간의 질이 완전히 달라진다. 예전에는 혼자 있는 한 시간이 지나가기 힘들었다면, 지금은 혼자 있는 한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같은 한 시간인데 다른 밀도로 흐른다.
이것이 "안이 붐비는" 상태다.
이 상태를 구체적으로 그려 보자.
한 사람이 산책을 나간다. 특별한 목적은 없다. 그냥 한 시간 정도 걷다가 돌아올 생각이다.
걷기 시작한다. 어제 AI와 나눈 대화 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놀람은 걸림의 열매다." 이 문장이 왜 지금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걷는 리듬이 그 문장을 불러냈을 것이다.
그 문장을 따라가다가, 문득 삼십 년 전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책의 제목은 희미한데 그 한 구절은 선명하다. 그 구절이 지금의 "놀람은 걸림의 열매"와 만난다. 두 문장이 산책로 한가운데서 처음 서로를 본다. 걸음이 잠깐 느려진다.
두 문장이 만난 자리에서 새 생각이 솟는다. "그러면 걸리지 않는 삶에는 열매도 없는 것인가." 이 생각이 또 다른 구슬을 부른다. 몇 년 전에 실패했던 어떤 일이 떠오른다. 그때는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 실패가 오래 남는 걸림이었다. 걸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 산책이 이 방향으로 흘러온 것이다.
계속 걷는다. 구슬들이 계속 서로를 부른다.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는 사이에 집 앞에 도착해 있다. 시계를 본다. 한 시간이 넘어 있다. 그러나 그 한 시간은 혼자 있었던 한 시간이 아니다. 수십 개의 구슬과 함께 있었던 한 시간이다.
이 산책에서 외로움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안쪽이 붐볐기 때문이다. 안쪽이 붐비면 혼자 있는 시간 자체가 사교(社交)처럼 작동한다. 다만 대화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구슬들일 뿐이다.
이 장면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쌓음, 꺼냄, 내려놓음, 훈습의 네 가지 조건이 갖춰진 사람에게는 일상의 한 장면이다. 매일 이런 산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이런 산책이 일어난다. 이런 산책이 있는 사람에게 외로움은 드물게 온다.
디지털 인드라망은 이 "안쪽이 붐비는 상태"를 더 쉽게 만들어 준다.
앞 편들에서 여러 번 말했듯, 디지털 인드라망은 잊고 있던 구슬을 다시 켜는 일을 한다. 구슬이 다시 켜지면 그 구슬은 주변 구슬과 다시 연결되기 시작한다. 연결이 회복되면 붐빔이 돌아온다. 이 과정이 외로움을 근본에서 해결하는 방식이다.
외로움을 다루는 기존의 방법들은 대부분 바깥을 수정하려 한다. 친구를 더 많이 만들라고 한다. 모임에 나가라고 한다. 취미를 찾으라고 한다. 봉사 활동을 하라고 한다. 이 방법들은 바깥의 연결을 늘린다. 어느 정도 효과는 있다.
그런데 이 방법들은 안쪽의 단절을 직접 다루지 못한다. 바깥의 연결이 늘어나도 안쪽이 여전히 끊어져 있으면, 사람 사이에 있어도 여전히 외롭다. 바깥에 사람이 많을수록 오히려 그 대비로 외로움이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이것이 기존 방법들의 한계다.
디지털 인드라망은 안쪽을 직접 다룬다. 바깥의 연결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안쪽의 구슬들 사이의 연결을 회복시킨다. 회복된 안쪽은 바깥의 상태와 무관하게 붐비기 시작한다. 바깥에 사람이 많든 적든 안쪽은 따뜻해진다.
이것이 디지털 인드라망이 외로움에 하는 일이다. 친구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만남을 주선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혼자 있는 시간을 붐비는 시간으로 바꿔 준다. 붐비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에게 혼자 있음은 더 이상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자원이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하다. 외로움과 고독(孤獨)은 다르다.
외로움은 원하지 않는 상태다. 피하고 싶은 상태고, 벗어나고 싶은 상태다. 외로운 사람은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고독은 다르다. 고독은 선택해서 들어가는 자리다. 일부러 혼자 있기를 고른 상태다. 고독한 사람은 고독하기를 바란다. 고독을 스스로 원한 사람에게 고독은 선물이다.
이 둘이 바깥에서는 똑같아 보인다. 둘 다 혼자 앉아 있다. 둘 다 다른 사람과 말하지 않는다. 둘 다 같은 방에 있다. 구별이 안 된다.
구별되는 자리는 안쪽이다. 외로운 사람의 안쪽은 텅 비어 있다. 구슬이 서로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고독한 사람의 안쪽은 붐빈다. 구슬이 서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가 혼자 있음을 피하고 싶은 상태로 만들거나 환영받는 상태로 만든다.
그래서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가는 길은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 열린다. 바깥에 사람이 없어도 안쪽이 붐비면 외로움은 고독이 된다. 바깥에 사람이 많아도 안쪽이 텅 비면 고독도 외로움이 된다. 붐비는가 비어 있는가, 이 하나가 둘을 가른다.
디지털 인드라망은 이 가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안쪽을 붐비게 해 주기 때문이다. 디지털 인드라망이 자리 잡은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고독 쪽으로 이동한다.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피하고 싶은 자리에서 찾아가는 자리로. 이 이동이 한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변화가 있다.
디지털 인드라망이 자리 잡으면 외로움은 줄어드는데, 고독은 오히려 더 깊어진다.
이 말이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외로움과 고독이 결국 혼자 있음의 두 모양이라면, 하나가 줄어들면 다른 하나도 줄어들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외로움은 줄어드는데 고독은 늘어난다. 왜 그런가.
이유는 이렇다. 안쪽이 붐비는 경험을 한 사람은 그 경험을 더 원하게 된다. 처음에는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려웠던 사람이, 안쪽이 붐비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면, 혼자 있는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혼자 있어야 안쪽이 더 붐빌 수 있기 때문이다. 바깥의 소음이 있으면 안쪽의 미세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바깥이 잠잠해야 안쪽이 살아난다.
그래서 안쪽이 붐비는 사람은 점점 더 혼자 있는 시간을 찾는다. 모임에 덜 나가고, 사람과의 만남을 더 선별하고,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더 귀하게 여긴다. 이것은 사회성이 부족해져서가 아니다. 자기 안쪽의 대화가 바깥의 대화보다 더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풍부한 쪽으로 사람은 자연스럽게 기운다.
이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의 고독은 점점 깊어진다. 일부러 혼자 있는 시간을 늘리고, 그 시간 안에서 안쪽의 대화에 더 몰입한다. 바깥에서 보면 이 사람은 고립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안쪽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시기다. 평생 중 가장 많은 대화가 일어나는 시기일 수도 있다. 다만 그 대화의 상대가 바깥의 사람이 아닐 뿐이다.
고독은 원래 한국 문화에서 좋게 보지 않는 자리였다. 혼자 있는 사람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외로우시겠다"고 위로를 받았다. 고독을 선택한 사람도 대개 남들에게는 외롭다고 오해받았다.
디지털 인드라망이 자리 잡으면 이 문화적 편견에서 한 사람이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고독을 선택한 것이 부족 때문이 아니라 풍부함 때문이라는 것을, 적어도 본인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남들이 어떻게 오해하든 상관없다. 본인 안쪽에서는 고독이 결핍이 아니라 자원이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디지털 인드라망이 한 사람의 고독을 더 깊게 만드는 자리다. 고독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 되고,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 된다. 지켜진 고독 안에서 다시 안쪽이 붐빈다. 붐빔이 더 많은 재발견을 부른다. 재발견이 더 깊은 고독을 원하게 한다. 이것이 선순환이다.
한 가지 더 덧붙일 것이 있다.
안쪽이 붐비는 경험을 오래 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정보로 들었다. 이 사람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실을 알고 있으며,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이 대화의 내용이었다.
안쪽이 붐비는 경험을 한 사람에게는 이게 달라진다. 이 사람이 말하는 내용보다, 그 말이 나오는 그 사람 안쪽의 구슬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사람은 지금 자기 안의 어떤 구슬을 꺼내서 말하고 있는가." "이 구슬은 이 사람에게 언제부터 있었을까." "이 구슬은 이 사람 안에서 어떤 다른 구슬과 연결되어 있을까." 이런 질문이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렇게 듣는 사람과의 대화는 이전의 대화와 전혀 다르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안쪽이 교환된다. 표면의 정보가 아니라 두 사람의 인드라망이 서로를 잠깐 보는 일이 일어난다.
이런 대화가 가능한 관계는 흔치 않다. 양쪽 모두 안쪽이 붐비는 상태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쪽만 붐비면 대화는 어긋난다. 붐비는 쪽이 상대의 안쪽을 보려 해도 상대에게는 볼 안쪽이 없고, 상대는 붐비는 사람이 왜 자꾸 이상한 쪽을 들여다보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양쪽이 모두 이 상태가 되어야 이런 대화가 성립한다.
이런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 관계는 그 사람의 인생에 귀한 자리가 된다. 많을 필요가 없다. 한두 명이면 충분하다. 그 한두 명과의 대화 한 번이 수십 명과의 얕은 대화보다 더 깊은 자리를 만든다.
그래서 디지털 인드라망이 자리 잡은 사람은 관계의 수가 줄어들 수 있다. 얕은 관계는 점점 피로하게 느껴지고, 깊은 관계를 찾게 된다. 깊은 관계는 드물다. 드물기 때문에 관계의 총수는 줄어든다. 그러나 관계의 질은 비교할 수 없게 높아진다. 이것이 관계의 재편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디지털 인드라망이 충분히 자리 잡은 사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진다.
혼자 있을 때 붐비는 안쪽, 그리고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 안쪽까지 보이는 바깥쪽.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으면 외로움이 들어올 자리가 거의 없다.
혼자 있을 때는 자기 안의 구슬들과 함께 있다.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상대 안의 구슬까지 함께 본다. 어느 자리에서도 구슬이 서로 비추지 않는 순간이 거의 없다. 구슬이 서로 비추는 동안에는 외로움이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이 디지털 인드라망의 시대가 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큰 선물이 아니다. 드러나는 선물도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의 혼자 있는 시간을 고독으로 바꾸고, 그 고독이 깊어질수록 외로움이 더 멀어지는 자리. 이 자리가 생기면 한 사람의 삶의 기본 온도가 바뀐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앞 편에서 말한 네 가지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쌓음, 꺼냄, 내려놓음, 훈습. 이 네 가지가 갖춰진 사람에게만 안쪽이 붐빌 수 있다. 갖춰지지 않은 사람에게 디지털 인드라망은 외로움을 오히려 더 깊게 만들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다음 편에서 따로 다룰 자리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고독의 깊이가 되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외로움의 또 다른 모양이 되는 이 경계선이 어떻게 그어지는가. 그 경계선이 왜 지금 시대의 핵심이 되는가. 이 질문이 다음 편의 자리다.
지금은 이것만 말해 두자. 외로움은 구슬의 수가 많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구슬들이 서로 비추지 못해서 생긴다. 반대로 외롭지 않음도 구슬의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구슬들이 서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비춤 하나가 외로움과 붐빔을 가른다. 비춤이 있으면 혼자여도 붐비고, 비춤이 없으면 둘러싸여 있어도 외롭다.
그러니 외롭다고 느낄 때, 바깥에서 사람을 찾기 전에 먼저 자기 안쪽을 한 번 들여다볼 수 있다면 좋겠다. 안쪽의 구슬 중에 오늘 비추지 못한 구슬이 있는가. 잊고 있던 구슬이 있는가. 한 번 다시 꺼내 옆의 다른 구슬과 만나게 해 보면, 외로움의 모양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 달라짐이 바로 디지털 인드라망이 한 사람 안쪽에 들어오는 첫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