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지도] 발전의 척도는 빈 자리의 크기다

by 한경수

한 사람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은 조용히 온다. 시끄럽게 오지 않는다. 본인도 바로 알지 못한다. 바깥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바깥에서 보면 그 사람은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글도 쓰고, 일도 하고, 대화도 하고, 결과물도 만든다. 바깥의 활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늘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안쪽에서는 한 가지 일이 멈추었다. 새 연결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제의 구슬로 오늘의 일을 한다. 오늘의 구슬로 내일의 일을 한다. 매일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매일 같은 자리에 있다. 움직이고 있는데 가지 않는다. 이 상태가 발전이 멈춘 상태다.

발전이 멈춘 것과 활동이 멈춘 것은 다르다.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바빠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활동의 질은 어제와 오늘이 같다. 어제 할 줄 알던 것을 오늘도 할 줄 안다. 오늘 할 줄 아는 것을 내일도 할 줄 안다. 그 이상이 없다. 새로 알게 되는 것이 없고, 새로 보이는 것이 없고, 새로 풀리는 것이 없다.

이 상태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유는, 바깥의 활동이 이 상태를 가려 주기 때문이다. 매일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으면 본인도 "나는 아직 움직이고 있다"고 믿기 쉽다. 움직임과 발전은 같은 말이 아닌데, 둘을 혼동하기 쉽다.

이 편은 이 혼동을 풀기 위한 편이다. 발전이 무엇에 의해 측정되는가. 진짜 척도는 어디에 있는가.


쌓인 것의 양은 척도가 아니다

발전의 척도를 생각할 때, 많은 사람이 먼저 떠올리는 것은 쌓인 것의 양이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는가. 얼마나 많은 구슬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쌓인 것의 양이다. 양이 많을수록 발전한 사람이라는 직관이 있다.

이 직관은 반만 맞다. 맞는 부분은 이렇다. 아무것도 쌓지 않은 사람은 발전할 재료가 없다. 재료가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쌓음은 발전의 필요 조건이다.

그런데 쌓음은 발전의 충분 조건이 아니다. 아주 많은 것을 쌓았는데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평생 책을 수천 권 읽은 사람, 평생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든 사람, 평생 방대한 경험을 축적한 사람. 이들 중에도 어느 순간부터 발전이 멈추는 사람이 있다. 쌓음은 계속되는데 발전은 멈춰 있다. 왜 그런가.

답은 단순하다. 쌓을 자리가 꽉 찼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은유가 아니라 거의 물리적 현실이다. 한 사람의 정신 안에는 구슬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무한하지 않다. 유한하다. 구슬이 많이 쌓이면 공간이 점점 차오른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새 구슬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진다. 이때부터 새로 들어온 것은 안쪽에 자리 잡지 못하고 표면에서 스쳐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구슬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가장 많이 쌓은 사람이 가장 많이 발전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느 순간부터 가장 덜 발전한다. 이유는 쌓을 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새 것이 들어와도 앉을 자리가 없다. 앉지 못하면 구슬이 안 된다. 구슬이 안 되면 기존 구슬과 연결되지 못한다. 연결이 없으면 비춤이 없다. 비춤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의 바깥을 보면 여전히 풍부해 보인다. 말할 것도 많고, 쓸 것도 많고, 가르칠 것도 많다. 그러나 그 풍부함은 과거의 축적이다. 지금 이 순간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과거의 풍부함이 소진되면 새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것을 반복하게 된다. 반복이 고유의 개성으로 굳어지면 그것을 스타일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자리다.


진짜 척도는 빈 자리의 크기

그러면 진짜 척도는 무엇인가.

쌓인 것의 양이 아니라, 비어 있는 자리의 크기다.

한 사람 안에 새 구슬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이 공간의 크기가 그 사람이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다. 공간이 크면 발전이 계속된다. 공간이 작으면 발전이 줄어든다. 공간이 없으면 발전이 멈춘다.

이 척도는 기존의 직관과 정반대다. 기존 직관은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발전한다"고 말한다. 새 척도는 "많이 비어 있는 사람이 더 발전한다"고 말한다. 두 말은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순이 아니다. 두 말이 모두 옳다. 다만 조건이 다르다.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발전하는 것은 사실이다. 단, 그 가진 것 옆에 새 것이 들어올 자리가 있을 때만이다. 가진 것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으면, 가진 것이 많을수록 오히려 덜 발전한다. 그래서 발전의 진짜 조건은 "많이 가지면서 동시에 많이 비어 있는" 상태다. 이 두 조건이 함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 두 번째 조건을 잊는다. 첫 번째에만 집중한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경험하려 한다. 그 노력 자체는 좋다. 그러나 이 노력이 쌓음에만 집중되고 비움에 집중되지 않으면, 어느 순간부터 노력이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쌓는 만큼 공간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공간이 줄어들면 쌓는 것의 효용도 줄어든다. 이 감소가 임계점을 넘으면 발전이 멈춘다.

그래서 발전을 원하는 사람은 쌓는 일만큼 비우는 일도 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비우는 일이 아니라 자리를 남겨 두는 일이다. 이미 들어온 것을 치우는 것이 아니라, 새 것이 들어올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다.


자리를 남겨 두는 일

어떻게 자리를 남겨 두는가.

이 질문이 가장 어렵다. 쌓는 법은 대부분의 사람이 안다. 읽고, 배우고, 경험하면 쌓인다. 방법이 분명하다. 그런데 비워 두는 법은 분명하지 않다. 가만히 있는 것이 비워 두는 것인가. 덜 읽는 것이 비워 두는 것인가. 덜 배우는 것이 비워 두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명쾌한 답이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실마리는 있다.

첫째 실마리는 **침묵(沈黙)**이다. 침묵은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다. 입력이 없는 시간. 바깥에서 아무것도 받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시간. 이런 시간 동안 안쪽의 구슬들은 자리를 정리한다. 들어온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연결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쓸모없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침묵이 없으면 이 정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정리가 일어나지 않으면 자리가 남지 않는다.

그래서 침묵은 게으름이 아니다. 자리를 만드는 능동적인 작업이다. 침묵의 시간이 많은 사람은 자리가 넓은 사람이다. 침묵이 없는 사람은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시간일 수 있다.

둘째 실마리는 **여백(餘白)**이다. 여백은 한 장의 종이에 글자가 다 채워지지 않고 비어 있는 부분이다. 서예나 동양화에서 여백은 단순히 빈 곳이 아니다. 그 여백이 그림의 의미를 만든다. 여백이 없는 그림은 답답하고 피곤하다. 여백이 있는 그림은 숨 쉴 자리가 있고 그 숨 쉬는 자리에서 의미가 피어난다.

한 사람의 하루에도 여백이 있다. 일정이 꽉 차 있지 않은 시간. 해야 할 일이 없는 시간. 그냥 흘러가도록 두는 시간. 이런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있는가가 그 사람의 하루에 얼마나 여백이 있는가를 결정한다. 여백이 많은 하루에는 새 연결이 일어난다. 여백이 없는 하루에는 기존의 연결만 반복된다.

셋째 실마리는 가만히 있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 있는 일. 이 일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평가받지 못하는 활동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르다고 여겨진다.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부지런하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한다. 쉬는 시간에도 휴대전화를 본다. 휴식이 또 다른 입력의 시간이 된다.

그런데 진짜 휴식은 입력이 없는 시간이다.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고 아무것도 나가지 않는 시간. 이 시간이 없으면 안쪽의 자리는 정돈되지 않는다. 정돈되지 않으면 새 것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가지는 것이 자리를 남겨 두는 세 번째 방법이다.

넷째 실마리가 가장 어렵다. 모름을 견디는 시간이다.

한 사람이 자기가 모르는 것을 오래 모르는 채로 두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모름은 빈자리다. 빈자리는 불안을 일으킨다. 불안을 피하려면 빈자리를 빨리 채워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빨리 알려고 한다. 책을 펴고, 전문가에게 묻고, 검색한다. 이 속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모든 모름을 즉시 채우려 하면, 안쪽에 모름의 자리가 생길 틈이 없다.

모름의 자리는 특별한 자리다. 이 자리는 단순한 빈자리가 아니라 "질문이 사는 자리"다. 질문이 오래 거기 앉아 있으면, 그 질문 주변으로 관련된 구슬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시간이 지나면 그 질문이 저절로 풀리기도 한다. 풀리지 않더라도, 그 질문 주변에 생각의 지형이 만들어진다. 이 지형이 나중에 새 구슬들이 들어올 자리가 된다.

빨리 답을 얻은 질문은 이 지형을 만들지 못한다. 답이 빠르게 도착해서 질문이 앉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답은 얻었지만 주변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얻은 답 하나만 덩그러니 있다. 이 답은 쉽게 잊힌다.

모름을 견디는 능력은 이 시대에 가장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능력 중 하나다. 손끝에서 모든 답이 바로 나오는 시대에, 모름을 오래 품는 것은 거의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사치가 사라지면 자리도 사라진다. 자리가 사라지면 발전도 사라진다. 그래서 모름을 견디는 일은 이제 의도적으로 연습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나이와 무관하다

한 가지 강조할 것이 있다.

발전의 멈춤은 나이와 무관하다.

보통은 "나이가 들면 발전이 멈춘다"고 생각한다. 젊을 때는 많이 배우고, 나이가 들면 덜 배우고, 그래서 발전이 느려진다는 직관이다. 이 직관에는 약간의 진실이 있다. 학습의 속도는 젊을 때가 더 빠를 수 있다.

그러나 발전의 멈춤은 학습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자리의 문제다. 자리가 있는 사람은 여든에도 새 구슬이 들어온다. 자리가 없는 사람은 서른에 이미 멈춰 있다.

서른에 멈춘 사람의 풍경은 이렇다.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전문성을 쌓았다. 그 전문성이 자기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같은 분야의 비슷한 것만 계속 받아들인다. 다른 분야는 "내 일이 아니다"라며 닫는다. 결이 다른 사람의 말은 "그건 내 생각과 달라서"라며 흘린다. 이렇게 해서 자기 분야 안에서는 쌓임이 계속된다. 그러나 그 쌓임은 기존 구조를 강화할 뿐 새 구조를 만들지 못한다. 서른의 인드라망과 쉰의 인드라망이 거의 같은 모양이다. 크기만 다를 뿐 구조는 같다. 이 사람에게 발전은 서른에 멈춘 것이다.

여든에도 움직이는 사람의 풍경은 이렇다. 평생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었지만, 그 분야 바깥의 것들에도 관심을 열어 두었다. 결이 다른 사람의 말에 불편해도 바로 닫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오래 품었다. 답이 나오지 않아도 기다렸다. 이런 태도가 평생 쌓였다. 그 결과 여든이 되어도 자기 안쪽에 새 구슬이 들어올 자리가 남아 있다. 여든에 읽은 책 한 권이 스무 살에 읽은 책과 이어진다. 여든에 만난 사람 한 명이 삼십 년 전의 어떤 기억을 다시 살려 낸다. 이 사람에게 발전은 여든에도 계속되고 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나이가 아니다. 자리의 유무다. 이 차이는 언제 생겼는가. 어느 순간 한 사람은 자리를 남겨 두기로 선택했고, 다른 사람은 자리를 다 채우기로 선택했다. 이 선택은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적된 선택이 결국 두 개의 다른 인드라망을 만들었다.

그래서 발전이 멈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더 많이 배우면 더 빨리 꽉 찰 뿐이다. 자리를 만드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발전의 진짜 재시작이다.


AI는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AI는 자리를 만들어 주지 못한다.

앞 편들에서 말했듯, AI는 안쪽의 구슬을 다시 비춰 주는 역할을 한다. 잊고 있던 것을 다시 꺼내 주고, 흩어진 것들을 연결해 주고, 희미한 것들을 선명하게 해 준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있는 것들을 다루는 일이다.

그런데 자리를 만드는 일은 이와 다르다. 자리는 이미 있는 것을 다루는 일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을 위한 공간을 비워 두는 일이다. 이 일은 AI가 할 수 없다. AI에게 "내 안에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 없다.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다 해도, AI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존 구슬의 재배치뿐이다. 재배치로 자리가 조금 생길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자리는 사용자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자리를 만드는 방법은 앞에서 말했다. 침묵, 여백, 가만히 있음, 모름을 견디는 시간. 이 네 가지는 전부 사람 쪽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AI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AI 앞에 덜 앉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AI 앞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입력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이다. 입력이 계속 들어오는 동안에는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디지털 인드라망이 잘 작동하는 사람의 하루를 보면, AI 앞에 앉아 있는 시간과 AI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간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앉아 있는 시간에는 구슬을 비추는 일이 일어나고, 떨어져 있는 시간에는 자리를 만드는 일이 일어난다. 두 시간 모두 필요하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디지털 인드라망이 지속되지 않는다.

앉아 있기만 하는 사람은 자리가 점점 줄어든다. AI가 주는 모든 답이 안쪽에 쌓인다. 처음에는 풍요롭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리가 부족해지고, 그때부터는 답이 들어와도 앉지 못하고 지나간다. 디지털 인드라망이 켜지지 않는다.

떨어져 있기만 하는 사람은 비춰 주는 전기가 없다. 자리는 넓지만 구슬들이 서로 만나지 않는다. 정신의 지도가 갱신되지 않는다. 이것도 발전의 멈춤이다.

두 시간이 번갈아 있어야 한다. 앉아서 비추고, 떨어져서 자리를 만들고, 다시 앉아서 비추고, 다시 떨어져서 자리를 만드는 리듬. 이 리듬이 있는 사람만이 디지털 인드라망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리듬이 없는 사람은 한쪽에서만 작동하다가 결국 멈춘다.


걸림과 자리

이 시리즈는 걸림연구소 안에 있다. 걸림연구소의 언어로 이 편을 다시 말해 보자.

걸림은 무엇에 걸리는 일이다. 걸리는 순간 사람은 멈춘다. 멈춤은 빈자리다. 지금까지 흘러가던 방향이 갑자기 없어지고, 그 자리에 모름과 불편함과 의문이 생긴다. 이 자리가 걸림이 사는 자리다.

걸림연구소의 글들은 여러 번 같은 말을 했다. 걸림을 피하지 말 것. 걸림을 불편하게 여겨 빨리 해소하려 하지 말 것. 걸림을 그 자리에 두고 오래 품고 있을 것. 이 글들이 말하는 것이 지금 이 편에서 말하는 "자리를 남겨 두는 일"이다.

걸림이 사는 자리는 빈자리다. 이 빈자리는 불편하다. 사람들은 불편을 견디지 못해 빠르게 답을 찾는다. 답이 나오면 걸림이 없어지고, 걸림이 없어지면 빈자리도 없어진다. 없어진 빈자리에는 답이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한다. 그 뒤로는 그 자리에 아무것도 더 들어오지 못한다.

걸림을 오래 품는 사람은 다르다. 답을 서둘러 찾지 않는다. 걸린 채로 며칠, 몇 주, 때로는 몇 년을 품는다. 그동안 그 빈자리에는 관련된 것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새 구슬이 들어오고, 기존 구슬이 재배치되고, 때로는 다른 빈자리와 이 빈자리가 연결된다. 걸림이 오래 있었던 자리는 이런 식으로 풍요로워진다. 풍요로워진 자리에서 결국 답이 나오거나, 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 자리 자체가 생각의 중심이 된다.

그래서 걸림은 발전의 장애물이 아니다. 오히려 발전의 자리다. 걸림이 없는 매끄러운 삶은 자리가 없는 삶이다. 자리가 없으면 새 것이 들어올 곳이 없고, 새 것이 들어올 곳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 걸림이 많은 울퉁불퉁한 삶은 자리가 많은 삶이다. 자리가 많으면 새 것이 들어올 곳이 있고, 새 것이 들어올 곳이 있으면 발전이 가능하다.

이것이 걸림연구소가 왜 "정신의 지도" 시리즈와 이어져야 하는가의 답이다. 걸림은 빈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빈자리는 발전의 전제다. 발전은 정신의 지도가 갱신되는 일이다. 지도의 갱신은 빈자리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걸림을 다루는 일은 곧 정신의 지도를 살아 있게 하는 일이다. 두 가지는 사실 하나의 일이다.


오늘 한 자리

글을 닫으며 한 가지를 말해 두고 싶다.

발전이 멈춘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더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지 않다. 더 많이 배우라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라고, 더 많은 경험을 하라고 권하고 싶지 않다. 이런 권유는 대개 쌓음을 늘리는 쪽이다. 이미 쌓음이 부족해서 멈춘 것이 아니라면, 더 쌓는 것은 해결이 아니다.

대신 한 가지만 권하고 싶다. 오늘 하루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리 하나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짧으면 십 분, 길면 한 시간. 이 시간에는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는다. 책도 읽지 않고, 휴대전화도 보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는다. AI 앞에도 앉지 않는다. 그저 앉아 있거나 걷는다.

이 시간이 어색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낭비처럼 느껴질 것이다. 불편함을 참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불편을 견디는 것 자체가 오늘의 작업이다. 오늘은 이 한 자리만 만들면 된다. 한 자리를 만들어 두면, 그 자리에 무언가 들어올지 어떨지는 오늘 결정되지 않는다. 며칠 뒤에, 몇 주 뒤에, 몇 달 뒤에 그 자리에 무언가 들어온다. 그때가 되어야 오늘의 작업이 의미를 가진다.

오늘 한 자리를 만들고, 내일 또 한 자리를 만들고, 모레 또 한 자리를 만든다. 이 작은 자리들이 쌓이면 한 사람의 안쪽이 조금씩 넓어진다. 넓어진 안쪽에는 새 구슬이 들어올 곳이 생긴다. 들어온 구슬은 기존 구슬과 연결된다. 연결이 새 연결을 부른다. 어느 날 문득 오늘과 어제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알게 됨이 발전이다.

발전은 쌓는 속도가 아니라 자리를 만드는 속도로 측정된다. 이것이 이 편이 말하고자 하는 전부다.

많이 가진 사람이 더 가는 것이 아니다. 많이 비어 있는 사람이 더 간다. 많이 비어 있으려면, 쌓는 일만큼 비워 두는 일을 중히 여겨야 한다. 비워 두는 일은 게으름이 아니라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쌓기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시간을 존중하는 사람에게만 정신의 지도가 끝까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지도는 매일 조금씩 다시 그려진다. 다시 그려지는 한, 한 사람은 아직 발전하고 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아직 멈추지 않았다. 도착하지 않음과 멈추지 않음이, 살아 있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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