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도구라면, 도구가 바뀌어도 괜찮은 것 아닌가. 묘소 앞에 앉아 이 질문이 떠올랐다.
AI에게 베트남어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할 수 있다고 했다. 태국어도 된다고 했다. 다만 표면은 유창하고 깊이는 얕다고 했다. 일상 회화는 되지만, 그 언어 안에서 살아온 사람의 결까지는 못 간다고. 언어가 도구라면, 도구가 작동하고 있으니 된 것 아닌가. 그런데 뭔가 걸렸다.
걸림을 영어로 옮기면 obstacle이 된다. hindrance가 된다. snag이 된다. 어느 것도 걸림이 아니다. 걸림은 장애물이 아니다. 멈춤도 아니다. 지나가다 무엇인가에 옷자락이 걸리듯, 의식이 어딘가에 걸리는 그 순간이다. 자발적이지도 않고 강제적이지도 않다. 일어나고 나서야 일어났음을 안다. 이것을 영어 한 단어로는 옮길 수 없다. 설명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은 그릇이 아니다.
포르투갈어에 saudade라는 말이 있다. 그리움이라고 번역하지만, 그리움이 아니다. 없는 것을 향한 기쁨과 슬픔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함께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일본어에 もののあはれ가 있다. 사물의 슬픔이라고 번역하지만, 슬픔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감응이라고 한다. 독일어의 Sehnsucht도 그렇다. 동경이라고 번역하지만, 동경이 아니다.
이 단어들은 번역되지 않는다. 설명은 된다. 그러나 설명된 것과 그 단어가 담고 있는 것은 다르다. 설명은 바깥에서 가리키는 것이고, 단어는 안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릇 없이 가리키기만 하면, 모양은 전해지지만 결은 전해지지 않는다.
라틴어가 죽었을 때, 라틴어로 길어 올린 것들은 유럽 언어들 안에 살아남았다. 법률 용어, 학술 개념, 종교 언어가 옮겨갔다. 그러나 옮겨가지 못한 것도 있다. 키케로가 라틴어 문장의 리듬으로 만들어 낸 설득의 결, 베르길리우스가 라틴어 6각운의 호흡으로 심어 둔 서사의 무게. 내용은 번역되었지만, 그 그릇에서만 작동하던 결은 그릇과 함께 사라졌다.
그릇은 무엇을 길어 올릴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걸림이라는 그릇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의식이 어딘가에 걸리는 그 순간을 한 단어로 잡아 둘 수 있었다. 그 단어가 없었다면 그 순간은 이름 없이 흘러갔을 것이다. 이름이 없으면 잡히지 않고, 잡히지 않으면 쌓이지 않고, 쌓이지 않으면 사유가 되지 않는다.
최명희가 17년 동안 한 일이 이것이었다. 혼불 안에 1930년대 전라도의 그릇들을 심어 두었다. 베틀 소리의 이름, 세시풍속의 이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던 말의 이름. 그 이름들이 살아 있는 문장 안에서 작동하도록 심어 두었다. 사전에 올리면 박제가 되고, 민속지에 기록하면 표본이 된다. 문학 안에 심어야 살아 있는 채로 남는다.
묘소로 올라가는 길에 안내판이 있었다. 거기에 적혀 있었다. 끝끝내 그 이름 완산이라 부르며. 이름을 부르는 입이 끊기지 않아야 그 땅이 있다고.
그릇이 사라지면 무엇이 사라지는가. 그 그릇으로만 길어 올릴 수 있던 것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사라진다. 걸림이라는 말이 없는 언어에서는, 걸림이라는 경험 자체가 이름 없이 흘러간다. 없는 것은 없는 줄도 모른다.
그래서 그릇을 지키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릇 안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 알아야 지킬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