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연구소] 버리라는 말의 자리

by 한경수

요즘IT에서 'Unlearn'에 관한 글 한 편을 읽었다.

카카오 정신아 의장이 2026년 신입 공채 자리에서 던진 화두에서 출발한 글이다. 어제의 답이 오늘의 정답이 아닐 수 있으니, 내 방식이 맞다는 과거형 확신을 내려놓으라는 말이었다.


글은 정직했다. AI 도구는 들였는데 보고서 양식도, 코드 리뷰도, 결재 라인도 그대로라 일이 두 배가 되었다는 진단. Learn - Unlearn - Relearn 루프에서 가운데 단계가 가장 자주 건너뛰어진다는 분석. 가장 잘해온 사람이 가장 버리기 어렵다는 한 줄.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글을 덮고 한참 걸렸다.
도입에 바둑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 배울 때 "지금까지 알던 거 다 잊어라"라는 말을 듣는다는 이야기. 인터넷에서 어설프게 익힌 정석 한두 개가 제대로 된 수읽기 학습을 방해한다는 비유였다.


50년을 둔 자리에서 이 말은 조금 다르게 들린다.
바둑판 앞에서 정말로 일어나는 일은 "잊어라"라는 명령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잊으려고 잊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판을 두고 지고, 다음 판에서 같은 자리에 다시 손이 가고, 또 지고, 그러다 어느 날 그 자리가 손에서 미끄러진다. 버린 것이 아니라 걸려서 떨어진 것이다. 의지로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잠재에서 다른 것이 올라온 것이다.


글이 권하는 세 가지 실천—기준의 출처 묻기, 한 프로세스 AI로 대체 실험, 찜찜함의 정체 포착하기—은 깔끔하다. 그러나 이 셋은 모두 의식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동작이다. 묻고, 실험하고, 포착하라. 다 능동태다.


내려놓음이 능동태로 일어나는 일이라면 누구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능동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버리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안에서 자라나서 옛것이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때 비로소 떨어진다. 쌓음과 꺼냄과 훈습이 먼저 있고, 내려놓음은 그 결과로 따라오는 일이다.


Unlearn이라는 말은 그래서 절반만 맞다.

'un'이라는 접두사는 동작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는 환상을 준다. 학습한 것을 비학습할 수 있다는 환상. 그러나 사람 안에서는 그런 식으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잊는 것은 새로 배우는 일의 반대편이 아니라, 새로 배우는 일의 그림자다. 충분히 새로 자란 자리에서만 옛것이 비로소 떨어진다.

신입에게 Unlearn을 권한 자리도 다시 보게 된다. 글은 이것을 "기존 조직이 못 버리고 있다는 거울"로 읽었다. 그것도 맞다. 그러나 한 겹 더 있다. 신입에게는 아직 버릴 것이 별로 없다. 버릴 것이 없는 사람에게 버리라고 말하는 자리에는, 말하는 사람의 안타까움이 먼저 있다. 자기는 못 버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건넨다.


가장 잘해온 사람이 가장 버리기 어렵다는 말은 그래서 절반만 진실이다. 나머지 절반은 이렇다. 가장 잘해온 사람이 가장 깊이 걸린다. 그리고 깊이 걸린 자리에서만 진짜로 떨어지는 것이 있다.


버리라는 말은 명령이 아니라 기다림에 가깝다.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에 가깝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리의 문제다.


37년을 가르친 자리에서 한 가지가 계속 걸렸다. 그 걸림이 있어서 GAISE 2016이 들어왔고, 들어온 자리에서 enook 10년이 자랐다. 무엇을 버리겠다고 결심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걸린 자리에 다른 것이 자라났고, 자라난 만큼 옛 자리가 좁아졌다.


Unlearn을 권하는 모든 글에 한 줄을 보태고 싶다. 버리려 하지 마시라.

걸리시라.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자랄 시간을 주시라. 떨어지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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