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노스팍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팍 Aug 10. 2018

엉덩이 폭만큼

박상훈의 INNOSPARK, 2010년 10월호

잡스님 가라사대 [1]


태블릿(Tablet) PC 시장을 향해 진군하는 삼성전자, RIM, HP, LG전자, KT, DELL, 도시바 등의 북소리가 하늘을 뒤덮고 있다. 올해 아이패드로 전 세계 태블릿 PC 시장의 4분의 3을 점유할 것으로 예상되는 절대 강자, 애플은 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성벽을 보다 높고 견고하게 쌓고 있다. [2]


애플 제국의 아이패드 성(城)을 함락시키기 위한 공성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기업은 올해 말 갤럭시 탭 GALAXY Tab을 출시할 삼성전자이다. 태블릿 PC 구매를 희망하는 소비자 중 한 사람으로서 필자도 아이패드와 갤럭시 탭을 여러 모로 비교하며 무엇을 사는 것이 좋을까 고민 중이다.


여러분은 두 제품 가운데 무엇을 갖고 싶은가? 그리고 그 제품으로 정한 까닭은 무엇인가?

1,000가지가 넘은 앱을 고려하면 당연히 아이패드이지만 9.7인치의 커다란 ‘크기’를 생각해보면 선택을 주저하게 된다. 실제로 영국 내 아이패드 보유자 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62%가 아이패드를 주로 집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3] 이렇게 모바일 기기로 출시된 아이패드가 큰 크기 때문에 무거워져 이동성이 떨어지는 것은 치명적인 단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후발주자인 삼성전자가 갤럭시 탭의 크기를 7인치로 정한 것은 참으로 탁월한 결정이라 할 수 있다.


개발부터 마케팅까지 제품 기획을 총괄한 김종인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상품전략담당 상무는 이에 대해 "7인치는 프랭클린 다이어리, 문고판 책, 탁상용 액자 등 우리 일상생활 속에 흔히 만날 수 있는 치수이기 때문에 휴대하기 가장 좋은 크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4]


한 손에 잡히는 갤럭시탭 [5]


애플이 이에 맞서기 위해 내년 초에 7인치 크기의 ‘미니 아이패드’를 출시한다는 소문도 있고 [6], 그게 아니라 크기는 바꾸지 않고 보다 얇게 만들 뿐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7] 삼성전자도 조만간 10인치 크기의 갤럭시 탭을 만들어 아이패드에 맞불을 놓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또한 확정된 사항은 아니라고 한다. [8]


두 회사 모두 상대 기업의 초점을 흐리고 자원을 분산시키고자 이런저런 뉴스를 언론에 흘리고 있을 수 있으므로 진실은 실제 제품이 출시되어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뉴스들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이렇게 태블릿 PC 전쟁의 성격을 ‘성능과 기능’에서 ‘크기’로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삼성전자는 새로운 방식으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공성전으로 비유하자면 수성하는 애플이 높고 두꺼운 성벽으로 투석기를 막으려 했지만 삼성전자는 성벽 아래로 굴을 파고 들어가 전장을 '성 바깥'에서 '성 안'으로 바꾼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삼성전자가 열세인 앱의 질과 양으로 정면 승부하기보다 태블릿 PC ‘크기’의 표준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을 잘 이용한 것이다.
 

이렇듯 최첨단 제품인 태블릿 PC가 복잡한 ‘기술’이 아닌 단순한 ‘크기’의 문제로 재정의되면서 삼성전자는 앱과 같은 ‘기술’ 영역에서 좀 더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만에 하나 '크기'의 표준이 7인치로 굳어지기라도 한다면 천하의 애플이라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된다.
 

2.7인치차이 [9]


아무리 그렇다 해도 1,000가지가 넘는 앱과 아이패드 자체에 축적된 고도의 ‘기술’이 7인치라는 물리적 ‘크기’에 휘둘린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를 물리학과 경제학 등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는 개념인 ‘경로의존성(Path-Dependence)’으로 이해해 보자. [10]

경로의존성은 간단히 말해 과거의 결정이 상황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변함없이 지속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금성사 (LG)가 1975년 개발한 샛별 텔레비전의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유명한 광고 문구처럼 한 번의 선택이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11]

모든 것을 결정해버린 '엉덩이 폭' [12]

      

여기에서 '경로의존성'과 관련된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다. [13]


우주선 연료 탱크 양 옆에 있는 로켓 추진체 두 개는 기차로 운반한다.
로켓 추진체는 터널을 지나게 되므로 터널의 폭에 맞추어 그 너비를 결정했다.

터널의 폭은 기차의 너비보다 약간 넓게 만들어졌고, 기차의 너비는 레일의 폭보다 조금 넓게 제작되었다.

유럽 철도의 레일 간 표준 거리는 1.435m(4피트 8.5인치)이다.

초기 철로는 전차를 만들던 사람들이 설계했고, 가장 처음에 전차를 만든 사람은 이전에 마차를 만들던 사람이다. (철로의 폭이 석탄 운반용 선로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영국 도로에서 마차 바퀴의 표준 폭은 1.435m로 정해져 있었는데, 이는 유럽 전역에 도로를 건설한 로마제국의 전투용 마차의 바퀴 너비가 1.435m이기 때문이었다.
도로에 파인 일정한 폭의 바퀴 자국으로 인해 너비가 다른 마차가 이 도로를 달리면 바퀴의 수명이 짧아져 대부분의 마차가 이 규격에 따라 제작되었다.

로마인들이 전투용 마차의 바퀴 너비를 1.435m로 정한 까닭은 마차를 끄는 두 마리 말의 엉덩이 너비가 1.435m였기 때문이다.


말의 엉덩이부터 시작된 ‘1.435m의 폭’은 수천 년 동안 로마의 전투용 마차, 영국의 마차, 전차, 기차, 터널을 거쳐 우주선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정확한 상관관계는 알 수 없지만 마차와 비슷한 자동차의 모양과 크기를 보면 ‘1.435m의 폭'은 아마 자동차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만약 코끼리가 말보다 흔한 동물이고 로마인들이 코끼리 마차를 즐겨 탔다면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코끼리 마차 [14]


이 그림과 같이 마차의 너비가 두 마리 코끼리만큼 넓었다면 아마 그 이후에 발명된 수많은 '탈 것'들의 너비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폴 데이비드(Paul A. David) 교수는 “어떤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이 판명된 후에도 그 길을 벗어나기 힘들다”라고 말한다.

검은 티와 청바지를 걸치고 간간이 나타나 IT 산업 전체를 뒤흔드는 ‘잡스님 가라사대’가 가능한 이유는 스티브 잡스가 이렇게 ‘벗어나기 힘든 그 길’을 너무나도 쉽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아이패드를 굳이 9.7 인치로 크게 만든 까닭은 작은 크기에 대한 니즈를 3.5인치의 아이폰에서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기업 시장을 생각해 보면 문자 입력과 가독성 측면에서 조금이라도 더 큰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벗어나기 힘든 그 길’에서 벗어나려면 그 길 Path에 의존 Dependence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갈림길에서 [15]


로버트 프로스트 Robert Lee Frost가 쓴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로스트가 말하는 '한숨'은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435m의 폭'을 가진 마차들이 많이 다닐수록 바퀴 자국은 점점 깊어지고, 사람들이 많이 다닐수록 '그 길'의 윤곽은 점점 뚜렷해진다.


지금 당장은 '그 길'만 잘 따라가면 실패는 절대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신나게 걷던 그 길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잠깐 생각해보자.


먼 훗날 '그 길'의 끝에서 '가지 않은 길'을 가보지 못해 '후회의 한숨'을 쉬지는 않을까?

이와는 반대로 먼 훗날 노인이 된 우리가 어디선가 “만약 젊은 시절에 ‘그 길’에서 벗어나 ‘가지 않은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인생이 지루했을까!”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지는 않을까?


가을이 조금 더 깊어지면 내가 진정으로 가고 싶은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길을 걷는 것도 좋겠다.







[1] 스티브 잡스가 신제품을 발표할 때마다 IT산업 전체가 흔들리는 것은 혹시 그에서 성스러운 능력이 있어서는 아닐까? 이 그림은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소개하는 키노트 스피치를 하기에 앞서 그의 ‘말씀’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희화한 작품이다. 아래 링크로 가면 더욱 재미있는 그림들을 볼 수 있다.

Top 5 “Holy” Apple CEO Steve Jobs Illustrations / Photoshopped Images      

http://obamapacman.com/2010/01/top-5-holy-apple-ceo-steve-jobs-illustrations-photoshopped-images/

[2] 애플 아이패드에 도전장 내민 삼성, 디지털 타임스, 2010. 9. 5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10090602012349615001

[3] 영국인은 아이패드를 어디에 사용할까?, 아이뉴스24, 2010. 8. 14

http://it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510054&g_menu=020300

[4] "내달 출시 갤럭시탭, 영상통화도 가능", 한국일보, 2010. 9. 28

http://news.hankooki.com/lpage/economy/201009/h2010092802312821540.htm
[5] 갤럭시 탭 홈페이지

http://galaxytab.samsungmobile.com/ 
[6] 애플, 갤럭시탭 겨냥한 '아이패드 미니' 내놓나?, 경제투데이, 2010. 9. 22
http://www.eto.co.kr/?Code=20100922144221640&ts=225942
[7] 아이패드 차기작, 내년 2분기 나온다, 전자신문, 2010. 9. 29
http://www.etnews.co.kr/news/detail.html?id=201009290171
[8] "견제에 나선 삼성과 애플…" 삼성도 10인치 '갤럭시탭' 만든다?
http://www.eto.co.kr/?Code=20100924114659703&ts=201131

[9] Samsung reveals rival to Apple's iPad: the Galaxy Tablet, NYDailyNews.com
http://www.nydailynews.com/money/2010/09/02/2010-09-02_samsung_to_go_head_to_head_with_ipad_with_new_galaxy_tablet.html

[10] 복잡계로 바라본 조직관리, 최창현, 2005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Path_dependence
경로 의존성과 전환 비용, 이희상 성균관대 시스템경영공학과 교수, 디지털 타임스, 2007. 8. 17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07081702012369619005

[11] [건국 60년, 대표 기업의 성공DNA] <3> 고객이 중심이다, 한국일보, 2008. 8. 21
http://news.hankooki.com/lpage/economy/200808/h2008082102573121540.htm

[12] http://www.straightdope.com/columns/read/2538/was-standard-railroad-gauge-48-determined-by-roman-chariot-ruts

[13] 이기는 사람들의 게임의 법칙, 쑤춘리, 2010

[14] http://oldindianphotos.blogspot.com/2010/07/delhi-durbar-of-1903.html

[15] Man on forked road, George Schill




*커버 이미지 출처: https://www.vectorstock.com/royalty-free-vector/chariot-vector-1801409


매거진의 이전글 흑묘백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