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북적거리는 광화문 인근, 해가 지고 네온사인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하는 초저녁이었다.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주황빛 노을에서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천천히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평소 말수가 적던 동료가 내 책상으로 다가왔다.
"오늘 저녁 시간 어떠세요? 아는 분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있는데..."
평소 회식도 잘 하지 않는데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걸 보니, 뭔가 특별한 자리임이 틀림없었다.
"좋죠, 어디로 가면 되나요?"
호기심과 기대감에 이끌려 나는 흔쾌히 동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는 새로운 만남이 어쩌면 좋은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시끌벅적한 치킨집이었다. 번화가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 체인점은 활기 넘치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형광등 아래 반짝이는 테이블에 앉자 직원이 상기된 얼굴로 메뉴판을 건넸다.
그러나 평화로운 분위기도 잠시, 한 남자가 우리 테이블에 합류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 마디는 뜬금없이 정치 얘기였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대화의 시작이려니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말은 점점 더 과장되고 현실감을 잃어갔다.
그의 끝없는 독백이 계속되는 동안, 테이블의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옆자리의 한 여성이 조용히 자리를 피해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 역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나는 이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치킨 특유의 향과 시끄러운 주변 소음 속에서, 나는 점점 더 고립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순간, 나는 단순한 저녁 식사가 어떻게 이렇게 복잡한 상황으로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의 예의를 지키려 노력했지만, 그의 끊임없는 인맥 자랑이 나를 점점 지치게 했다. 그는 특정 정치인과의 친분을 과시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형, 동생 하는 사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심 불편해하면서도, 나는 참을성 있게 듣기로 했다. '세 번만 더 참자'라는 마음가짐으로 묵묵히 앉아있었다.
"제가 지금 당장 전화할 수 있어요!"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첫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불편한 감정을 삼켰다.
"고향이 같아서 제가 형님 형님 하면서 막연한 사이예요."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설령 그가 말하는 정치인이 그의 친형이라 해도, 이 자리와 무슨 상관인지 의문이 들었다. 진정 친밀한 관계라면, 초면인 자리에서 이렇게 과시할 필요가 있을까? 두 번째 손가락을 접으며, 나는 그의 말의 진실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전화해 보겠습니다. 받으실 거예요!"
그의 말에 나는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설사 그가 정말로 정치인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다 해도, 과연 이 시간에 전화를 받을까? 그리고 받는다 한들,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과시가 누군가를 감동시킬 거라 생각하는 그의 태도가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동료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의 눈빛에서 미안함과 혼란이 교차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분이 오실 줄은 전혀 몰랐어요."
나는 그저 옅은 미소로 답했다.
"괜찮아요.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잖아요. 그럴 수 있죠."
동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서울의 밤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걸으며 나는 오늘 밤의 경험을 곱씹어보았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후광 반사 효과'(Basking in Reflected Glory, BIRGing)라고 부른다. 이는 개인이 자신의 직접적인 성취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성공을 자신과 연관 지어 자존감을 높이려는 심리적 현상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관계 중심적 문화에서는 이런 후광 반사 효과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유명인이나 권력자와의 관계를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
오늘 밤 그 남자의 행동도 전형적인 후광 반사 효과의 예시였다. 그는 정치인과의 허술한 연결고리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타인의 영광에 기대려 할까? 그 이면에는 우리 내면의 깊은 불안과 자존감의 결여가 숨어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나방처럼,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할 때 외부의 권위나 명성에 매달린다. 이는 공작새가 화려한 깃털을 펼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현란한 외양 뒤에는 생존을 위한 절실한 몸부림이 숨어있다.
한국 사회에서 '인맥'은 마치 보이지 않는 화폐와 같다.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가 중요시되는 이 독특한 생태계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며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려 한다. 이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과 같다.
인생이라는 미로 같은 여정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 증명의 방식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오늘 밤의 불편했던 경험은 역설적으로 이 선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타인의 후광에 의지해 잠시 빛나는 것보다, 자신만의 작은 불빛을 키워나가는 여정.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과 자아 실현의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