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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는 곧 메시지다: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언어

수백 개의 브랜드 메시지가 우리의 무의식을 관통하고 있다

by 조인후

당신은 오늘 아침 몇 개의 브랜드를 소비했는가? 아이폰으로 알람을 끄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테슬라를 타고 출근했다면, 당신은 이미 네 개의 기업이 설계한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은 브랜드를 통해 말하고, 브랜드로 생각하며, 브랜드로 존재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브랜드가 시키는 대로 존재한다.


브랜드: 21세기의 새로운 종교


과거 종교가 인간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브랜드가 그 자리를 강탈했다. 애플의 신제품 출시 행사는 현대판 종교 의식이다. 신도들은 기꺼이 밤새 줄을 서고, 수십만 원을 지불해 '구원'을 구매한다. 럭셔리 브랜드의 패션쇼는 21세기의 성당이며, 그곳에서 신자들은 소비라는 성찬식을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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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엄 촘스키는 "광고는 자유시장의 선전이다"라고 갈파했다. 하지만 그것은 과소평가다. 브랜드는 단순한 선전을 넘어 전체주의적 사상 통제 시스템이 되었다. 소비자-브랜드 관계 연구에 따르면, 소비자들의 브랜드 충성도의 원천이 서로 다른 다양한 요인들에 기반하고 있으며, 소비자의 라이프 이벤트와 라이프 테마가 브랜드 충성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브랜드들이 종교의 메커니즘을 의도적으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장품을 파는 게 아니라 희망을 판다" - 에스티 로더의 이 말은 이제 낡은 레토릭이다. 현대의 브랜드들은 더 교묘하고 잔혹하다. 그들은 희망을 팔지 않는다. 절망을 먼저 만들어낸 다음, 그 해결책을 판다.


페이스북이 메타로 사명을 바꾼 것은 "현실이 지겹다면 우리가 만든 가짜 현실로 도피하라"는 메시지다. 테슬라는 "친환경 전기차로 지구를 구한다"고 홍보하지만, 실제 메시지는 "당신의 양심은 깨끗하다"는 착각을 파는 것이다. 전기차 배터리에 필수적인 리튬과 코발트를 채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파괴와 아동노동 착취는 교묘하게 은폐된다. 소비자는 "환경보호에 기여했다"는 도덕적 우월감을 구매하고, 불편한 진실은 보지 않아도 되는 편의를 함께 얻는다.


국내 어느 기업이 플라스틱 생수병 라벨에 멸종위기종 황제펭귄과 해달의 그림을 새기며 "환경을 위한다"고 홍보한 사례가 현대 브랜딩의 극치다. 플라스틱 페트병이 바다에 버려져 바로 그 멸종위기종들이 피해를 받는다는 사실은 철저히 은폐했다. 소비자들은 "환경보호에 동참했다"는 착각을 구매하고, 기업은 환경파괴의 주범인 플라스틱병을 더 많이 판매한다. 이것이 그린워싱(Green Washing)의 완벽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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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의 진화: 세 가지 치명적 변화


1. 초개인화라는 이름의 감시 자본주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가 『감시 자본주의 시대』에서 명명한 '감시 자본주의'는 "행동 데이터로 변환하기 위한 무료 원자재로서 개인의 인간 경험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며, 이러한 데이터를 계산하여 예측 제품으로 패키징하고 행동적 미래 시장에 판매하는 경제 시스템이다.


넷플릭스는 같은 영화에 대해 사용자별로 다른 썸네일을 보여준다. 이는 A/B 테스트를 통해 클릭률을 향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실제로 기본 삽화 대비 14%, 6% 높은 콘텐츠 선택률(CTR)을 기록했다. 그들은 "당신만을 위한"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당신을 더 효과적으로 조종하기 위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것만 보게 되면서, 사용자의 취향은 점점 획일화된다.


2. 가치소비라는 새로운 소비주의의 가면

21세기 들어서 '가치소비'는 가장 비극적인 자기기만이다. "환경을 생각해서 산다"며 대나무 칫솔을 수십 개씩 주문하고, "동물을 보호한다"며 비건 제품을 과소비한다. 제로 웨이스트 제품들이 더 많은 포장재를 사용하는 아이러니는 이 시대의 모순을 압축한다. 자본은 반자본적 가치마저도 상품화해버렸고, 소비자들은 소비행위를 도덕적 실천으로 착각하며 자신을 기만한다.


3. 인플루언서라는 이름의 개인화된 광고판

인플루언서의 부상은 메시지 권력의 탈중앙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더 정교한 중앙집권화다. 거대 기업들은 이제 개인의 입을 빌려 메시지를 전달한다. 팔로워들은 광고를 보는 것이 아니라 '친구의 추천'을 받는다고 착각한다. 이는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경고한 것보다 더 교묘한 사상 통제다.


브랜드 메시지는 이제 공기처럼 편재한다. 당신이 '안티 브랜드'를 선택하는 순간, 그것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된다. 무인양품의 미니멀리즘도, 노브랜드의 실용성도 모두 정교하게 설계된 브랜드 메시지다. 탈출구는 없다.


엘리 파리저(Eli Pariser)가 『필터 버블』(2011)에서 경고한 현상이 현실이 되었다. 개인화된 검색의 결과물로, 사용자의 정보에 기반하여 웹사이트 알고리즘이 선별적으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사용자들이 자신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정보로부터 분리되어 자신만의 문화적, 이념적 거품에 갇히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다. 브랜드가 만들어낸 가짜 가치가 진짜 가치를 대체했고, 우리는 그것을 진짜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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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메시지 너머의 부재


마샬 맥루한이 "Advertising is the greatest art form of the 20th century"라고 한 것은 예언이었다. 현대의 브랜드 메시지는 거짓말조차 아니다. 그것은 진실과 거짓의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브랜드는 더 이상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현실 인식의 틀을 판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 타인과 관계맺는 방식까지 모두 브랜드의 설계 범위 안에 들어와 있다.


이 상황에서 '진정성 있는 브랜드'를 찾는 것은 아우슈비츠에서 인도주의를 찾는 것만큼 무의미하다. 시스템 자체가 진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완전한 절망인가? 아니다. 최소한 이 메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이 메시지 독재에 맞서는 유일한 저항이다.


"브랜드는 곧 메시지다"라는 명제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진단서이자 사형선고문이다. 우리는 메시지 속에서 태어나 메시지로 살다가 메시지로 죽는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수백 개의 브랜드 메시지가 당신의 무의식을 관통하고 있다. 저항하는가? 이미 늦었다. 당신의 저항조차 또 다른 브랜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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