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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Sep 04. 2024

수상한 노래방 사장님과 소년원에서 온 선물

노래방 사장님의 비밀 일기: 제주도의 어느 노래방에서 펼쳐진 인생 드라마

흐릿한 네온사인이 깜빡이는 골목길, 시끌벅적한 소리와 술 냄새가 뒤섞인 공기를 가르며 나는 제주의 어느 허름한 노래방을 찾아 들어섰다. 노래방을 운영하는 사장님처럼 보이는 중년의 여성분에게 화장실 위치를 물었다. 가리키는 위치로 향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들렸다.


"똥 쌀 꺼에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네?"


"화장실에서 똥 쌀 꺼냐고?"


"아니요"


가까운 가족도 물어보지 않는 질문이었다.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라 답변하기 전에 다시 한번 여사장님의 답을 확인해야 했다.


"근데 왜 그걸 물어보세요?"


"아니, 화장실에서 똥 쌀꺼면 이거 가져가라고."


사장님의 손끝이 가리킨 것은 화장지도 아니고 휴대용 선풍기였다.


"이거 없으면 화장실에서 더워 죽어."


여사장님의 황당 질문의 배경에는 손님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다만, 대화의 전개가 도입부 없이 이어져 내가 적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화장실을 다녀온 뒤 지인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사장님이 지키고 있는 카운터 뒤에 특이한 편지 보였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녀학생들의 사진이 편지의 테두리에 붙어 있었고 편지 가운데는 여러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OO야, 사랑해."


"앞으로도 오래 보자."


친구 사이의 우정을 담은 듯한 문구들. 하지만 이 감성 충만한 메시지들이 왜 하필 이 허름한 노래방의 카운터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걸까? 이 의문은 마치 퍼즐의 한 조각처럼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호기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갔다. 이 사진들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왜 이 노래방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여사장님의 이야기는 또 어떤 것일까?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노래방의 비밀을 풀어낼 열쇠를 쥐고 있는 여사장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저 사진들의 정체가 뭔가요?" 내 질문에 사장님의 눈빛이 순간 깊어졌다.



"우리 단골 손님들이에요." 그녀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손님들이 사장님에게 저렇게 편지와 함께 사진을 주고 갔다고요?"


내 목소리에 놀람이 묻어났다. 사장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지. 왜 저걸 주고 갔는지." 그녀의 눈빛에 애정과 혼란이 교차했다.


"그런데 공통점은 있어요. 다들 결손가정에서 자란 얘들이에요." 그 말에 내 가슴이 묵직해졌다.


사장님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갔다. 학교가 끝나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이곳을 찾아왔고, 그녀는 그저 편견 없이 대해주고 친구처럼 대화를 나눴을 뿐이라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점점 더 자주 오게 되었고, 심지어 가게 문을 열기도 전에 와서 기다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바빠서 가게를 잠시 비우면 알아서들 다른 손님들 계산도 해주고요." 사장님의 말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고등학생 손님들에게 카운터까지 맡긴다고요? 현금도 있을 텐데 말이죠."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냥 믿는 거지. 차라리 돈을 잃을 거면 나중에 큰돈 잃는 것보다 액수가 작을 때 잃는 게 나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그렇게 무한신뢰를 보이니까 한 번도 얘들이 돈에 손댄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웃으며 덧붙였다.

"웃긴 게 뭔지 알아요? 얘들 부모들도 여기에 자기 자식들이 자주 오는 거 알아요. 저기 냉장고에 보면 얘들 엄마 중 한 명이 갖다 준 김치가 있어요. 하도 자주 보니까 이제 언니 동생하는 사이가 되버렸어요."


이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단순한 노래방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넘어, 이곳이 하나의 작은 커뮤니티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방황하는 자식 때문에 고마움을 전하러 온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그리고 그녀가 이 모든 것을 시작한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잘해주긴 뭘 잘해줘. 그냥 나도 노래방 혼자 지키려면 심심하고 외로우니까. 말동무가 되어주고 그냥 선입견 없이 대해준 게 다에요."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자라 군대에 가고, 대학에 가고,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이곳을 찾아와 사장님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군 복무 중인 얘들은 휴가 나오면 또 여기 들렸다 가 해요. 그러면 내가 용돈으로 10만원씩 주고 해요. 고생한다고."



사장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슴을 울렸다. 냉장고 속 김치부터 휴가 나온 군인들에게 주는 용돈까지, 이 작은 노래방이, 그리고 이 평범해 보이는 여사장님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안식처이자 제2의 가족이 되어주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문득, 우리 사회에 이런 '사장님'들이 더 많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 시선이 카운터 한 구석에 놓인 이질적인 물건들로 향했다. 노래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조각품이 눈에 띄었다.


"사장님, 이건 뭐예요?" 나는 호기심에 못 이겨 물었다.


"아, 저거요." 사장님의 목소리에 잠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얘들 중 두 명이 소년원에 갔는데, 교화 과정에서 저런 걸 만드는 수업이 있나 봐요. 나중에 소년원 나오더니 저걸 들고 왔더라고요."


그 말에 나는 숙연해졌다. "그럼 지금 그 두 명은 뭐 하고 있어요?"


"한 명은 다시 또 사고를 쳤는데... 이제는 나이가 차서 교도소 갔어요."


사장님은 마치 일상적인 일을 얘기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 태도에 나는 다음 질문을 망설였다. 하지만 사장님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단순히 말동무를 해준 것뿐만 아니라, 불량한 무리와 어울리는 학생을 직접 그 무리의 우두머리와 담판 지어 데려온 일화까지 들려주었다.



나는 사장님이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예상치 못한 말이 이어졌다.


"이제는 얘들이 전부 졸업하고 흩어졌잖아요. 그런데 얘들한테 이렇게 정 주다 보니 저도 상처를 받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는 다른 학생들에게는 이만큼 정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겠죠."


사장님의 목소리에 서린 쓸쓸함이 가슴을 저몄다. 친자식보다 더 관심을 쏟고 위했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점점 발걸음이 뜸해지고, 연락도 뜸해지니 그 허전함이 얼마나 클까. 사장님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 관계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것이 마음 아팠을 것이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시작된 대화가 어느새 30분을 훌쩍 넘겼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걸 깨달은 사장님이 나를 재촉했다.


"이제 그만 방에 들어가서 노래나 해요. 더는 얘기 안 할 테니까."


방으로 향하는 내 뒤로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기 들어준 만큼 이용시간 더 드릴게요."


노래방을 나서며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늘 밤 불렀던 노래들은 기억나지 않겠지만, 이 작은 노래방에서 들은 사장님의 인생 이야기는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울려 퍼질 것 같았다. 때로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가장 깊은 인생의 교훈을 얻는다는 것을, 그리고 작은 관심과 사랑이 누군가의 인생을 얼마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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