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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동안 변질된 "동료"의 의미

동료의 철학: 어원에서 현재까지

by 조인후

월요일 아침,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우리는 그들을 '동료'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옆자리에 앉은 그 사람은 당신의 동료인가, 아니면 단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낯선 이인가?


이 질문이 우습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동료'라는 단어의 뿌리를 파헤쳐 보면, 우리가 얼마나 이 단어를 오용하고 있는지 소름 끼치게 깨닫게 된다.


신들이 맺어준 관계


로마 공화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콘술(consul)들은 서로를 'collega'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com-(함께)'과 'legare(위임하다)'의 합성어다. 그런데 여기서 'legare'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이것은 '신성한 임무를 법적으로 위임하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 동료란 신들이 직접 골라 같은 운명을 부여한 사람이었다. 우연히 만난 관계가 아니라, 초월적 힘에 의해 묶인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로마인들에게 'collega'는 단순히 함께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운명을 공유하는 영혼의 동반자였다.



동양도 다르지 않았다. 한자 '僚(료)'는 단순히 '벼슬'을 의미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 글자의 어원은 '밝다', '총명하다'는 뜻의 '了'다.


동료(同僚)의 본래 의미는 '같은 밝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공통된 지혜와 통찰을 공유하는 존재들. 고대 중국인들은 동료를 '서로를 비추어주는 관계'로 이해했다. 마치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밤의 어둠을 밝히듯, 동료들은 서로의 지혜를 반사하고 증폭시키는 존재였다.


어원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해준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동료'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의미의 동료가 아니다.


현대적 동료성의 변화


하지만 현대의 동료 관계는 어떨까? 어원적 의미와 비교해보면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신성성의 상실을 들 수 있다. 고대에는 동료가 신적 소명을 공유하는 관계였지만, 현대에는 조직적 기능을 수행하는 인적 자원으로 여겨진다. 현대의 동료 관계에서는 초월적 의미가 사라지고 순전히 기능적 관계로 축소되었다. 막스 베버가 말한 '세계의 탈주술화'가 동료 관계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더 이상 우리는 동료를 통해 신성한 무언가에 참여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또한 운명적 결속에서 계약적 관계로의 변화도 눈에 띈다. 고대에는 운명에 의해 결합된 불가분의 관계였다면, 현대에는 언제든 해지 가능한 계약적 관계가 되었다. 리처드 세넷이 지적했듯이, 현대 직장은 '유연성'을 추구하면서 깊은 유대감을 형성할 시간과 공간을 파괴했다. 동료는 더 이상 운명 공동체가 아닌, 프로젝트 단위로 결합했다가 해체되는 임시적 관계가 되었다.


가장 안타까운 변화는 상호조명에서 경쟁적 시선으로의 전환이다. 고대에는 서로를 밝혀주는 상호보완적 관계였다면, 현대에는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경쟁적 관계가 되었다. 푸코가 분석한 '파놉티콘'적 시선이 현대 직장에 편재한다. 동료의 눈은 더 이상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 아닌, 나를 평가하고 감시하는 권력의 눈이 되었다. '僚'의 원래 의미인 '서로 밝혀줌'은 '서로 감시함'으로 변질되었다.



철학적 관점에서 본 동료의 의미


하이데거는 인간을 '함께-존재(Mitsein)'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동료 관계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성이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장이다. 우리는 동료를 통해 단순히 개별적 주체가 아닌, 관계 속에서만 완성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우정을 '덕을 기반으로 한 관계'로 정의했다. 직장에서의 동료 관계도 마찬가지로,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서 서로의 성장과 탁월함을 추구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의 자아실현과 조직의 목적 달성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윤리적 책임이 시작된다고 했다. 동료는 바로 이러한 구체적 타자다. 추상적인 인류애가 아닌, 매일 마주하는 구체적인 얼굴들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윤리적 실천을 배우게 된다.


직장에서 동료가 중요한 이유


빅토르 프랑클이 말했듯이,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직장에서의 일이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을 넘어 삶의 의미로 승화되려면, 함께 그 의미를 만들어가는 동료들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창조할 수 없는 집합적 의미가 동료 관계를 통해 탄생한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 자아가 객관화된다고 보았다. 동료는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성찰적 거울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를 '함께 행동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직장은 하나의 정치적 공간이며, 동료들과의 연대를 통해 우리는 개인을 넘어선 집합적 힘을 경험한다. 이는 단순한 업무 효율성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정치적 본성을 실현하는 장이 된다.



잃어버린 의미들의 회복


현대인은 '직업(job)'은 있지만 '소명(calling)'은 없다. 어원적 의미에서 동료는 같은 소명을 받은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단순히 같은 업무를 처리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는 일의 의미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적 시간성'도 파괴되었다. 고대의 동료성은 연속성과 지속성을 전제로 했지만, 현대의 동료성은 순간성과 가변성에 기반한다. 이는 깊은 신뢰와 이해를 쌓을 시간적 조건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그렇다면 절망적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종교적 신성성은 사라졌지만, 인간 존재 자체의 신성성을 재발견할 수 있다. 임마누엘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에서 느끼는 무한한 책임감이 새로운 형태의 신성성이 될 수 있다.


영속적 관계는 불가능하더라도, 일시적이지만 깊이 있는 만남은 여전히 가능하다. 마르틴 부버가 말했듯이, 진정한 만남은 지속 시간의 문제가 아닌 만남의 질의 문제다.


조르주 바타유의 '소모' 개념처럼, 순전히 기능적이지 않은, 무목적적 선물이나 무조건적 도움을 통해 동료 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열 수 있다.



동료란 결국 함께 존재함의 의미를 탐구하고 실현하는 동반자다. 우리는 동료를 통해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이해의 지평에 이르고, 개인적 성장과 집합적 창조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는 단순히 직업적 필요성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인 '관계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장이다.


어원은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무엇을 회복할 수 있는지의 가능성도 제시한다. 현대의 동료성이 얕고 기능적으로 변질되었다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과제다. 고대의 신성성과 현대의 자유로움을, 운명적 결속과 개인적 선택을, 상호조명과 건설적 견제를 종합하는 새로운 동료성의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일 것이다.


따라서 좋은 동료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효율적인 업무 수행을 넘어서, 더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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