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혜 작가: 실(絲)로 짓는 자연의 시간
인사동 골목을 걷다 우연히 한 갤러리에 걸린 작품을 보게 되었다. 호기심에 갤러리에 입장하였고 그렇게 한 작가의 작품을 마주하게 되었다. 벽면에 걸린 작품들은 멀리서 보면 섬세한 그라데이션의 추상화였다. 짙은 남색에서 보라로, 청록에서 아쿠아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색의 변화. 수백, 수천 개의 반듯한 수평선들이 캔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거의 기계적일 정도로 정밀한 획들. 이건 작가의 완벽주의일까, 아니면 선에 대한 강박적 집착일까?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나는 경악했다.
캔버스를 채운 것은 붓질이 아니라 실이었다. 한 올 한 올 세밀하게 배치된 무수한 실들이 만들어낸 색채의 교향곡. 물감으로 여겼던 매끄러운 색면은 실상 수천 가닥의 실이 만든 시각적 착시였다. 근거리에서 관찰하자 실의 미세한 질감과 광택, 실 사이 틈새가 드리운 그림자까지—평면으로 인식했던 작품은 촉각적 깊이를 지닌 입체 구조물이었다.
이 반전은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졌다. 회화란 무엇인가? 색을 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날 나는 장지혜 작가의 작업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장지혜 작가는 '자연으로부터의 감성 추상'이라는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안현정 미술평론가는 작가가 "차분한 나와 교유하는 방식"으로 예술을 실천한다고 평한다. 그녀의 작업은 단순한 시각적 재현이 아니라 내면의 감각을 천천히 우려내는 과정이다. 작가는 이를 'Brewing Effect(감성 추상)'라 명명한다. 마치 차를 우려내듯 느긋하게 정성으로 실(絲)에 감성을 담아내는 것이다.
현대 사회가 속도와 효율을 추구할수록, 장지혜의 작업은 더욱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노동집약적이고 시간 소모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한 올 한 올 쌓아가는 실의 선들은 디지털 시대의 즉각성에 대한 성찰이자, 손작업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행위다. 과정 자체가 예술로 승화되는 것이다.
전통 회화는 붓에서 물감을 거쳐 캔버스로 이어지는 2차원적 평면이다. 색의 혼합과 덧칠을 통해 표현하며, 화가의 손끝에서 즉각적으로 완성되는 제스처를 담는다. 반면 장지혜의 방식은 손에서 실을 거쳐 캔버스로 이어지는 2.5차원적 공간이다. 색의 병렬 배치를 통한 광학적 혼합을 구현하며, 한 올 한 올 쌓아가는 시간의 축적 그 자체다.
이러한 접근은 매우 신박한 시도이면서, 동시에 작품에 독특한 볼륨감과 입체감을 부여한다. 실의 두께에 층의 개수를 곱하면 실제 물리적 깊이가 생성된다. 각각의 실이 만드는 미세한 높낮이, 실 사이의 틈새가 빛을 가두고 반사하는 현상, 실과 실 사이에 생기는 미세한 음영, 실제로 만질 수 있는 표면의 요철까지, 장지혜의 작품은 환영이 아닌 실재하는 입체성을 지닌다.
점묘주의의 쇠라(Seurat)가 점으로 광학적 혼합을 이뤘다면, 장지혜는 선(線)으로 광학적 혼합을 구현한다. 그러나 쇠라의 평면성과 달리, 장지혜의 작품은 실제 물리적 깊이를 보유한다. 실의 광택면이 빛을 반사하고, 실 사이 공간이 빛을 흡수하면서, 관람자의 위치와 조명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색채를 생성한다.
장지혜 작가는 실을 따로 염색하지 않고 기성 제품을 활용한다. 이는 일견 제약으로 보인다. 물감처럼 무한히 혼합할 수 없고, 기업이 생산한 정해진 색상 범위 내에서만 작업해야 하며, 미묘한 중간 톤을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약은 역설적으로 독특한 강점이 된다.
첫째, 인공적 혼합 없이 순색의 병치를 구현한다. 물감의 혼합이 만드는 탁함 없이 각 색이 고유의 순도를 유지한다. 색을 칠한 게 아닌 것이 오히려 자연의 원색성에 가까이 다가간다.
둘째, 색의 공존 미학을 실현한다. 작가 평론의 핵심 표현처럼, 실은 물감과 다르게 수천 색을 혼합하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색을 잃지 않는 특성이 있다. 물감은 파랑과 노랑을 섞으면 초록이 되면서 원색이 소멸하지만, 실은 파랑 실과 노랑 실이 나란히 배치되어 시각적 초록을 만들면서도 각각의 원색이 공존한다. 이는 철학적으로 개체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공동체, 차이를 유지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관계성, 소멸 없는 공생의 시각적 은유다.
셋째, 제한 속의 무한성을 발견한다. 기성 실의 제한된 색상 범위는 오히려 선택의 집중력을 강화한다. 작가는 더욱 세밀한 배치와 비율에 집중하게 되며, 제한된 색상이지만 배열 조합은 무한하다. 또한 기업이 생산한 색상 중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마치 시인이 제한된 어휘로 무한한 시를 쓰듯, 작가는 제한된 색상으로 무한한 자연을 포착한다.
작가는 자연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공명(resonance)한다. 모든 색을 혼합할 수 있는 인공 물감은 역설적으로 혼합할수록 자연에서 멀어지며, 화학적으로 만든 색은 자연색의 복제품에 불과하다. 반면 기성 실은 제한적이지만 각 색이 고유한 물질성을 가지고 있으며, 섬유 자체가 가진 자연스러운 질감과 광택, 염색된 실이라도 그 자체로 실재하는 색이라는 진정성을 지닌다.
자연의 하늘은 단일한 파란색이 아닌 무수한 푸른 입자들의 집합이다. 바다의 청록도 여러 층위의 색들이 겹쳐진 결과다. 작가는 기성 실이라는 '이미 존재하는 색의 입자들'을 자연이 색을 만드는 방식과 유사하게 배치함으로써, 재현이 아닌 구조적 유사성을 달성한다. 제한된 선택지 속에서도 최대한 자연의 색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장지혜의 작품에서 실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다. 누적적 시간과 공존의 미학을 동시에 표현한다. 각 색의 실들이 섞이면서도 고유성을 유지하는 방식은 관계미학의 실천이다.
작품의 볼륨감은 단순히 시각적 효과가 아니다. 실의 층위는 곧 시간의 층위다. 5mm의 두께는 수백 시간의 노동이며, 입체감은 시간이 쌓인 물리적 증거다. 관람자가 느끼는 입체감은 작가가 쌓아온 시간의 무게이자, 한 올 한 올이 만든 존재의 밀도이며, 공들인 작업이 만든 깊이의 실체다.
장지혜의 작업은 단순한 시각 예술을 넘어선 '촉각적 회화'다. 실을 만지는 손끝의 감성으로 단색화의 정신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이 하나가 되는 공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자연의 감각을 차분한 나와의 대화 방식으로 전환한다.
기법적으로 섬세하게 배열된 실의 선들이 만드는 촘촘한 수평선, 갑작스러운 전환 없이 은은하게 스며드는 색상의 점진적 변화, 실의 광택이 빛을 받아 미묘하게 변화하는 표면의 빛의 반사성, 여러 층의 실이 쌓이며 만드는 투명성과 중첩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시간의 시각화다. 각 선은 작가의 손이 지나간 시간의 증거이며, 수백, 수천 번의 반복된 행위가 만든 명상적 시간성이고, 자연의 리듬과 작가의 선이 하나로 수렴하는 순간이다. 동시에 자연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하늘과 바다, 새벽과 황혼을 연상시키면서도 구체적 재현을 거부하며, 자연을 향한 발걸음의 궤적을 시각화하고, 감각과 추상, 대상 사이의 순환을 형성한다.
이우환의 선(線)이 하나의 선에 집중된 시간과 정신을 담았다면, 장지혜는 이를 수천 개의 선으로 확장한다. 윤형근, 박서보의 단색화가 반복적 행위를 통한 명상을 실천했다면, 장지혜는 물감 대신 실로 한국적 단색화를 재해석한다. 안니 알베르스(Anni Albers)가 직조를 예술로 승격시켰다면, 장지혜는 직조 구조 없이 순수한 선의 배치로 차별화한다.
그러나 장지혜는 단순히 선배들의 연장선에 있지 않다. 그녀는 회화도 조각도 섬유예술도 아닌, 모두이면서 어느 것도 아닌, '실(絲)회화'라는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평면 회화가 3차원을 2차원에 환영으로 표현했다면, 장지혜의 실(實) 회화는 실제 물리적 깊이가 존재하며, 환영이 아닌 실재하는 입체성을 지니고, 회화이면서 동시에 조각적 속성을 지닌다.
장지혜 작가의 작업은 시간, 노동, 감각, 자연, 추상이 하나로 융합된 독특한 예술 세계다. 그녀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미니멀하면서도 풍부한 색채 경험을 제공하고, 철학적으로 느림과 깊이의 가치를 재발견하며, 미학적으로 한국적 여백 미학과 현대 추상의 만남을 보여준다.
기성 실을 사용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제약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해방이다. 색을 칠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각 색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혼합이 아닌 병치는 자연이 색을 만드는 방식과 동일하며, 각 실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공존의 윤리를 보여주고, 환영이 아닌 실제 입체감과 볼륨감은 물리적 진정성을 담보한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실을 배치하는 방식을 통해, 개인의 시간 속에서 탄생하는 작품의 생명력이 단순한 선(線)의 축적이 아니라 자연과 선의 리듬으로 이어지는 살아있는 예술임을 증명한다.
작가는 제한된 선택지를 창조적 제약으로 전환하여, 인공적 완전함보다 자연스러운 불완전함 속의 진정성에 도달했다. 이는 마치 전통 시조가 3장 형식이라는 제약 속에서 무한한 정서를 담아냈듯, 장지혜는 기성 실이라는 제약 속에서 자연의 무한함을 포착해 낸다. 그녀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공들인 시간이 쌓여 만든 깊이와, 각자의 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함께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그리고 자연을 재현하지 않고도 자연과 공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