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지는 나, 견뎌지는 나 - 결핍의 중력에 대하여

화석 연료의 삶에서 신재생 에너지의 삶으로, 가능한 구호일까

by Extraordinary

최근 뉴스 피드에서 개그맨 양상국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고(故) 박지선을 언급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잠시 잊고 지냈던 이름이지만, 그녀의 부고는 당시 나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유사한 사례로 '행복전도사' 최윤희, 그리고 배우 안재환의 선택 또한 우리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던 비극이었다. 그들이 생전에 보여주었던 밝은 모습과 당당한 가치관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결말이었기에 대중의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박지선은 생전 "나 자신과 나의 외모를 사랑한다. 예쁜 얼굴보다 웃길 수 있는 얼굴이 좋다"며 외모 비하 개그가 주류였던 당시 코미디계에서 독보적인 서사를 구축했다. SNS를 통해 어머니와의 유쾌한 일상을 공유하며 끈끈한 유대감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그 어머니와 함께 유명을 달리했다. 세상에 비춰진 밝고 강한 모습 이면에는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건강 문제, 특히 외모와 직결되는 피부 질환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어린 시절 받은 수술의 부작용으로 악화된 증상은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 역경을 딛고 성공한 그녀의 모습에 대중은 감동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처절했을지는 감히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의 삶도 이와 닮아 있다. '행복'을 전파하던 그녀의 타이틀이 무색하게 정작 본인의 삶은 지병의 악화로 고통받았으며, 결국 그녀를 돌보던 남편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행복전도사'라는 말은 사라진 단어가 되었다. "긍정적으로 살자", "웃으며 살자"는 구호는 강요된 낙관론으로 여겨진다. 혹자는 사회가 너무 냉소적으로 변하였다고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은 면만 보고,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라'는 긍정주의 메시지가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당사자를 가스라이팅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더이상 사회적으로 공감되지 않는 것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 "긍정의 배신(원제 Bright-Sided)")


안재환의 사례는 조금 다르지만 맥락은 유사하다. 명문대 출신의 수재 연예인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연기과 예능을 종횡무진하던 그는 동료 연예인 정선희와의 결혼으로 화제의 정점에 섰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었는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갑작스런 소식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그의 마지막 방식까지 일거수 일투족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동료 연예인과 대중에게 '베르테르 효과'를 불러일으킬 만큼 충격적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부족했을까. 어떤 결핍이 그를 거기까지 이끌어 갔을까.


이들의 삶을 함부로 재단할 의도는 없다. 다만 사후에 밝혀진 이야기들을 마주하며 안타까움과 애잔함, 그리고 속세의 좌절과 고단함에 고통받는 같은 인간으로서 깊은 동병상련을 느낀다. 박지선 씨는 자신의 외모를 무기로 성공했다는 자신감 넘치는 서사 뒤로, SNS에 이성 관계에서의 좌절이나 주변과의 해프닝을 '웃프게' 풀어내곤 했다. 당시엔 그저 인간적인 면모로 느껴졌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런 모순적인 상황들이 그녀를 서서히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자주 언급되던 어머니와의 관계 또한 그렇다. 수술 부작용으로 고통받으며 느꼈을 원망과, 그럼에도 유일하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이 뒤섞인 역설적인 현실이 그런 이야기들 속에 녹아 있었던 것 같다.


사회적 성공을 거둔 공인일수록 '보여지는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괴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느끼는 우울감 역시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세상이 요구하는 '유능하고, 행복하며, 상처받지 않는 강한 자아'를 연기하기 위해 소모되는 에너지는 막대하다. 이러한 강박은 서서히 우리를 멈출 수 없는 설국열차에 태우거나, 작은 불꽃에도 폭발할지 모르는 핸들 고장난 8톤 트럭처럼 스스로를 옥죄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사례들은 견고한 '사회적 자아'를 구축했더라도, 건강 악화처럼 물리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제약에 부딪히는 순간, 마치 유동성이 막힌 갭투자처럼 삶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핍은 나의 영혼을 갉아먹으며 저점을 높여주는데는 탁월하지만, 안정적인 고점을 이룩하는 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결핍과 열등감을 원료로 하는 에너지가 효율 높은 '화석 연료'라면, 이제는 오염 물질이 없는 '신재생 에너지'로 전환해야 할 때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도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음을 느꼈다. 개인의 물리적 제약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 아닐 때가 많고,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조언조차 누군가에겐 무책임한 방관처럼 들릴 수 있다. 사회적 자아 외에, 아무런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무능한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아프거나 가난해지더라도 나를 지탱해 줄 내면의 근간을 들여다보는 '내면의 구조조정'이 절실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자산을 다시금 재평가하는 시간, 나를 위해 써야 하는 확실한 리소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사회적 자아와 실제 자아의 괴리를 좁히는 것이 유일한 답일까. 래퍼 스윙스가 최근 "잘 될 때 닥쳐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타인의 부족함에 관대하지 않다. 오직 극복의 서사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Happily Ever After)'라는 결말에만 열광한다. 나 역시 사회에 순응하며 그 신화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욕심을 버리고, '나'라는 존재의 유지비를 줄여나가는 것이 어쩌면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성찰의 과정일까. 그것이 물리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건강도 잃고 소중한 사람도 잃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과연 인간은, 그리고 나란 존재는 스스로 메울 수 없는 결핍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위 글에 언급된 앞서 운명을 달리한 분들을 추모하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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