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장의 사진으로 남은 사내
이 글의 청탁을 받고 재단 사이트의 노회찬 선배 연보를 찾아봤다. 내 가물거리는 기억을 확정하려 찾아 봤다가 그 방대함에 놀랐다. 1956년부터 2018년까지 나열된 그의 생애사는 정말 한국 현대 진보정치사 그 자체라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이 중에서 나와의 첫 만남은 언제쯤일까 보니, 1992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사무실인 아현동으로 출근하던 때 부터였다. 그 위층이 내가 근무하던 월간지 <길을 찾는 사람들>의 사무실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내게 낯선 인물이었고, 그는 연배에 비해 거물이라 기자 초년병에겐 어려웠다. 그럼 언제쯤부터 그의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했을까 찾아봤다. 2008년 2월 서초동 법원에서 삼성 X-파일 건이다. 이때는 취재를 위한 사진이라기보다 나 역시 그와 함께 진보신당 창당에 함께하기로 했고, 오랫동안 알아 온 진보정치인에 대한 사진적인 호기심이 개인 작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사진가들에게는 그의 작업을 대표하는 페르소나 같은 인물 사진이 있다. 예를 들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카뮈 사진이 그러하지 않을까? 마치 그의 문학세계(이방인)나 정신세계(실존주의)를 몰라도 꽁초 담배를 입에 문 사진을 보면 그의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릴 듯 한 그런 느낌말이다. 나 역시 사진가로 활동하는 동안 무수한 인물들을 만나 초상 사진을 찍었지만 사회적인 반향이 가장 컷 던 것이 노회찬 선배였다. 그래서 내 작업 폴더 안에는 노회찬 폴더가 따로 있고 그곳에는 생애 10년간 쯤 되는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다. 물론 그가 찍힌 사진의 만분의 일도 안되겠지만 나름 그의 연대기처럼 나 홀로 감상할 때도 있다. 이 사진들 중에 단 몇 장만 꼽으라한다면 베스트 3가 있다.
3위는 2009년 4월 30일 울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조승수의원이 당선되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자정쯤 놀라운 역전극으로 당선되자 즉석에서 막걸리 파티를 했는데, 울산 당원 분이 색소폰을 불자 노회찬 선배는 빗자루를 들고 나가 멋지게 기타연주 흉내를 내는 사진이다. 나는 이 사진을 바로 SNS에 올렸고 그날 밤 내내 진보신당은 노회찬 선배의 엽기적인 모습으로 그 훈훈함을 전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온라인판까지 퍼다가 썼다.) 정치인 노회찬이 당과 조직에 얼마나 헌신하는가를 볼 수 있는 사진이다.
2위는 아마도 가장 많이 알려진 노회찬 선배 사진일 듯한데, 바로 첼로 연주 사진이다. 이 사진은 노회찬과 대담하는 여러 지식인들과 공동으로 집필한 책에 수록 된 것으로, 사진 역시 큰 비중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마들까지 찾아가 진지하게 첼로 연주를 부탁했고 그 선율을 느끼며 찍은 것이다. 나는 이 사진에서 노회찬 선배의 예술적 감성과 깊은 사유가 담긴 듯해서 좋다. 아마도 선배가 죽은 후 가장 많이 알려지고 인쇄 된 사진일 것이다.
1위는 2010년 1월 9일 용산 역 앞 아스팔트에서 찍은 것이다. 바로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노제였다. 추운 겨울날 이 노제는 부슬부슬 눈이 오는 중에 치러졌고 노 선배는 끝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이 사진은 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민중에 대한 그의 사랑과 평범하지만 영웅적인 면모가 동시에 표현 된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장의 사진은 소설가 윤흥길의 단편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제목처럼 내게 남아있다. 어차피 사진은 모든 것이 스케치이고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몇 장 안된다. 그의 한국 진보정당에 대한 헌신과 고뇌 그리고 영웅적인 모습이 나의 이 사진들로 남아있으니, 갔어도 그는 늘 곁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이 새벽, 남 몰래 그를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