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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piration Oct 13. 2021

본질에 대한 질문, 삶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스스로 묻고 답하는 것

'~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처음 접한 건,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을 때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 책을 읽었는데, 중학생 때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책을 적어야 할 때면 이 책 제목을 썼던 기억이 난다. 중학생에게 인생이란 무엇이었을까..

(지금 저 책의 내용은 물론 전혀 생각나지 않고, 주인공이 마시던 보드카 맛을 궁금해했던 기억만 떠오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작년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은 김영민 교수님의 '공부란 무엇인가'였다.

고민이 많을 때면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한다. 역시나 고민이 많을 때에 이 책을 읽었고 너무나 재밌게 읽었다. 몇몇 부분에서는 소리 내어 웃으며 읽기도 했다.

아, 글로 위트가 느껴질 정도가 되려면 대체 얼마나 훌륭한 글쓰기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걸까.. 감탄하며 말이다.



재미는 물론이고, 본질에 대한 사유를 다룬다. 그리고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공부는 무엇인지, 저자가 살아온 삶과 생각에 대해 얕고 깊게 이야기해 준다. 잘 살아온 어른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책에는 "추석이란 무엇인가"되물어라 라는 칼럼이 들어있다.

나의 어떤 설명보다 칼럼을 직접 옮겨 적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밥을 먹다가 주변 사람을 긴장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음식을 한가득 입에 물고서 소리 내어 말해보라. “나는 누구인가.” 아마 함께 밥 먹던 사람들이 수저질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은 대개 위기 상황에서나 제기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상시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한국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하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한국이 어떤 정책을 집행하는지, 즉 정체성보다는 근황과 행위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 규정을 위협할 만한 특이한 사태가 발생하면,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내 친구가 그 좋은 예다. 그의 부인은 일상의 사물을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인데, 얼마 전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오래된 연애편지를 활용해서 만든 것도 있었다. 특이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앞에서 작품의 소재가 된 옛 연애편지를 읽어보았다. 그런데 그 내용과 표현이 내 감수성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느끼해서 그만 그 자리에서 토할 뻔했다. 혹여 내가 연애편지를 쓰게 되는 상황에 다시 처한다면, “영민”이란 이름을 한 글자로 줄여서 “민”이라고 자칭하지는 않으리라. 나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지 않으리라. “민은 이렇게 생각한답니다”와 같은 문장을 쓰지 않으리라. “사랑하는 나의 희에게, 희로부터 애달픈 사랑을 듬뿍 받고 싶은 민으로부터”와 같은 표현은 결코 구사하지 않으리라.

 심정지가 올 정도로 느끼한 문장으로 가득 찬 그 연애편지가 하도 인상적이어서, 그 작품을 만든 친구 부인에게 이거 대체 누가 쓴 편지냐고 물었다. 그러자 천연덕스럽게 “대학 시절 연애할 때 제 남편이 제게 보낸 편지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과학자의 탈을 쓴 그 친구에게 이와 같은 면모가 있었다니! 며칠 뒤, 그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급기야 “그거 네가 쓴 연애편지라며?”라고 묻고 말았다. 그랬더니 평소 감정의 큰 기복이 없던 그 친구가 정서적 동요를 보이면서, 자신도 전시회에서 그 편지를 보고 그 내용과 표현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놀리고 싶어진 나는 왜 그런 느끼한 표현을 썼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갑자기 과학자다운 평정심을 잃고 고성을 질러댔다. “그 편지를 쓰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내가 왜 그랬냐고 묻지 마!”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괴성을 지르며 나를 할퀴었다. 그 더러운 손톱에 할퀴어지는 바람에, 내 손목은 진리를 위해 순교한 중세 성인처럼 피를 흘렸다.

 그 친구의 이러한 난동은 정체성의 질문이란 위기 상황에서 제기되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부정하기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파괴하려 들었던 것이다. 하나의 통합된 인격과 내력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한 것이다. 오늘도 그는 그 느끼한 연애편지를 쓰던 자신과 현재의 ‘쿨한’ 자신을 화해시키고,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인문학적으로’ 씨름하고 있으리라.
      


 추석을 맞아 모여든 친척들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의 근황에 과도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취직은 했는지, 결혼할 계획은 있는지, 아이는 언제 낳을 것인지, 살은 언제 뺄 것인지 등등. 그러나 21세기의 냉정한 과학자가 느끼한 연애편지를 쓰던 20세기 청년이 더 이상 아니듯이, 당신도 과거의 당신이 아니며, 친척도 과거의 친척이 아니며, 가족도 옛날의 가족이 아니며, 추석도 과거의 추석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질문은 집어치워 주시죠”라는 시선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 “늘그막에 외로워서 그런단다”라고 하거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칼럼이란 무엇인가.



웃으며 읽었다면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보시길.



교보문고의 책 리뷰를 보면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의견도 꽤 있다. 이 또한 나는 재밌게 느껴졌다. 나에게는 이 책이 공부가, 인생이, 공부하는 삶이 무엇이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게 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스스로 묻고 답하는 삶, 어쩌면 그 과정이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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